‘오이!오이!’ 외쳐대는 ‘펑크’로 대변되던 한국의 인디 음악이 그 지평을 서서히 넓혀가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했다가 사그러든 헤비메틀의 부활과 함께 하드코어, 힙합, 싸이키델릭까지… 주류 음악의 획일적인 장르와는 대조적으로 장르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다양한 시도들이 ‘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 “90년대 한국의 모던락”이다.
한국 모던락의 역사를 살펴 본다면 ‘산울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모던락은 주류 문화의 반대 편에 서서 자생력을 가지고 성장해 온 인디 문화의 다양한 모습 중의 한부분인 ‘모던락’이다. 하여, 모던락의 계보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 하기로 하자.
지금 인디 음악에서 대표적인 모던락 밴드를 꼽으라면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 ‘미선이’, ‘청바지’, ‘코스모스’, ‘은희의 노을’ 정도일 것이다. (그 외에 ‘러브마트’, ‘에브리싱글데이’ 등 많은 밴드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앞서 거론한 여섯 밴드의 이야기만 할까 한다)
락의 직설적인 화법과 ‘저항’이라는 코드를 따르지 않고, 락에서 필수 불가결한 기타의 디스토션과 강렬한 리듬 비트 없이 진행되는 이들의 음악은 공통적으로 매우 ‘팝’적인 멜로디로 포장되어 있다. 화려한 기교를 느낄 수 있는 연주 보다는 단순하고 깔끔한 연주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이들의 음악이 처음 들었을 때도 친숙하게 귀에 감기는 것은 바로 이런 ‘팝’멜로디 때문이다.
인디 음악은 그 생성과 발현 과정의 특성 때문에 주류 음악이 소화하지 못했던 문화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디 음악(특히, 대표주자였던 ‘펑크’의)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가사와 과격한 음악적 표현들이 시의적절하고 새로운 것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틀로 고정되는 경향이 생겼던 것 또한 사실이다. 획일적인 주류 음악의 반대 방향에 서 있는 이들이 또 다른 어떤 획일화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부상했던 모던락을 비롯한 새로운 경향들은 인디 음악 정신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단순하고 친숙한 멜로디와 조금은 추상적이고 정적인 가사, 깨끗한 여운을 남기는 사운드는 모던락의 특징이 되었다.
‘언니네 이발관’은 앞에서 거론한 모던락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왕언니’이며, 선구자 역할을 한 밴드다. 밴드가 태어나기까지의 과정도 남다른 이들의 노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개인의 소외를 마이너 정서로 노래하고 있지만, 그 방식은 소리내어 울부짖거나 힘찬 비트에 분노를 쏟아 붓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언니네 이발관은 차라리 살랑거리는 멜로디로 하소연하고, 슬퍼하고, 화낸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지 정확히 알고 행한 드문 케이스였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밴드였다. (가 우연히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들은 비트와 리듬 보다는 멜로디를, 애잔하고 서글픈 곡의 가사와 분위기를 더 중시했다. 멜로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음악은 리듬과 비트의 유행에서 비껴난 것이었지만 의외의 호응을 얻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것은 음악을 ‘잘’하는 것이 연주나 노래의 테크닉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때로는 소리쳐 외치는 것보다 나직하게 을러대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의사 전달법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의 노래는 달콤 쌉싸름한 새로운 맛이었다. 그리고 ‘델리스파이스’의 출현…
델리스파이스는 ‘맛있는’ 모던락을 보여준다. 언니네 이발관의 충격적인(!) 출현 이후 나타난 이들 역시 하이텔 모던락 소모임 출신이다. 이들의 경쾌한 멜로디는 브릿팝과 연결되어 있고, 과격하지도 유치하지도 않은 가사는 은유와 상상력 가득한 말의 성찬이다.
팝에 근접한 델리스파이스의 사운드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것은 키보드이다. 친숙한 곡조임에도 기타와 키보드를 통해 다양한 음을 내고 있는 델리스파이스의 음악은 세련되고 정돈되어 있다.
과 로 대표되는 이들의 음악은 드디어(!) 공중파를 장악(!!)하기도 한다. (별도의 작업이지만, 델리스파이스의 거의 모든 곡을 쓰고, 만들고,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는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의 앨범 역시-더 곱게 정제된 감성이지만- 델리스파이스 음악이 가진 개성의 일부가 아닐까)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스파이스’로 다져진 90년대 한국 모던락의 토양은 ‘미선이’와 ‘청바지’, ‘코스모스’, ‘은희의 노을’ 등의 새로운 밴드들의 활동으로 갈고 닦아진다.
‘미선이’는 -굳이 따지자면, 델리스파이스 보다는 언니네 이발관과 맞닿은 정서를 지닌 모던락 밴드이다. 자신들은 그저 ‘팝’을 하고 있는 밴드라고 강변하고는 있지만, 이들의 음악 은 ‘그저 팝’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심상찮다. (그렇다고 해서 ‘락’이 ‘팝’보다 낫다거나 ‘팝’은 유치한 것이고 ‘락’은 대단한 어떤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미선이의 음악에는 일반적인 팝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 이상이 담겨져 있고, 사운드 역시 ‘그저 팝’ 즉 가요의 사운드라기 보단 영국 모던락과 친한 사운드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선이 음악을 아우르고 있는 것은 ‘표류drifting’하는 젊음의 불안한 마음이고, 아직은 기성세대와 동류의식을 느낄 수 없는 세대의 소외되고 불편한 정서다. (기성언론에 대한 불만을 과 같은 은유로 표현할 수 있는 이들의 감성은 자신도 다치게 할 만큼 날 서 있는 동시에 수줍어하는 소년같다)
‘청바지’는 다른 모던락 밴드와는 조금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 밴드다. 최대한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팝 멜로디에 잔잔한 사운드를 내거나 경쾌하고 밝은 사운드를 내거나 했던 다른 모던락 밴드들과는 달리 청바지는 ‘복고’ 사운드를 친숙함의 무기로 삼았다. 흘러간 팝송과도 같은 사운드와 가사를 가진 청바지의 노래는 그래서 오히려 신선한 감을 준다.
‘코스모스’와 ‘은희의 노을’은 인디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감성 가득한 모던락 사운드를 펼치고 있는 밴드들이다. 아직은 직설적인 펑크 사운드가 지배적인 클럽 음악 속에서 이들의 음악은 다소 이질적인 존재다. 하지만 이들의 잔잔하고 달콤하고 때로는 냉정한 음악이 인디 씬의 영역을 넓혔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양함이야 말로 인디 음악의 특징이다. 대중 음악이라는 큰 산에서 작은 숲을 만들어 가고 있는 모던락의 푸른 성장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