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Kurt Cobain의 사망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죽은 다음 날이었는데,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던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건넨 “Kurt Cobain이 죽었대.”라는 소리에 순간 멍한 기분으로 ‘그게 누구일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기는 한데…’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 순간 ‘앗!!! Kurt라면 Nirvana의???? 그 멋진 남자가 죽었단 말이야??’라는 충격적인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어쩌다가…”라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권총자살을 했다는 것 같더라..”라는 그 친구의 대답은 나를 다시 한 번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했다. ‘Kurt가 자살을 했다고?? 마약과다복용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자살을??’ Kurt Cobain만은 그 누구보다도 그악스럽게 열심히, 자길 무시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늙어죽을 때까지 길이길이 잘 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그건 커다란 충격이었으나, 그보다 나를 더 슬프게 했던 것은 음악계의 커다란 빛이 하나 사라져 버렸구나 라는 아쉬움이랄까…. 아무튼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 하나 없어졌구나 하는 그런 서운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절대 무심하시지 않으신 법. Kurt라는 커다란 별을 저버렸지만, 그에 가려 그 빛을 제대로 내지 못한 멋진 보석들이 세상을 향해 반짝거림으로써 우리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Foo Fighters”와 “Hole”이다.
묻혀있던 진주 Dave의 Foo Fighters
그럼 Foo Fighters의 이야기부터 해보도록 하자. Foo Fighters는 Nirvana의 드러머였던 Dave Grohl (데이브 그롤)이 기타리스트와 보컬로 변신을 하여 만든 그룹이다. -여기저기서 드러머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는 이야기에 한숨들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는 군요.하지만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왜냐하면 그는 원래 기타리스트 였거든요. –
그롤은 10살에 집에 굴러다니던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2살에 첫 밴드를 결성했다. 양로원 등에서 연주를 하던 그에게 신천지의 세계가 열린 것은 그가 13살이 되던 해, 사촌 Tracey를 통해 펑크를 알게 되면서이다. 이때부터 그는 펑크에 빠져 들게 되어, Freak Baby라는 펑크밴드를 결성했으며, 처음으로 레코딩 작업을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영원한 동반자인 프로듀서 Barrett Jones를 만나게 된다.
그의 다음 밴드는 Hard-core Punk band인 Mission Impossible였는데, 엉망인 드러머의 솜씨를 보고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로의 포지션을 맞바꾸면서 드러머로써의 그의 인생이 시작된다. 이후 Rock, Art Punk 그리고 Hard core가 뒤섞인 Dain Bramage에 가입한 그는 17살의 생일에 첫 앨범을 녹음했으며, 전설적인 D.C.밴드인 Scream에 가입을 하면서 수년동안 대중적으로도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런 그가 Nirvana의 드러머가 된 동기는 너무도 단순하다. Kurt Cobain과 Krist Novoselic (Nirvana의 베이시스트)를 잘 알고있는 그롤의 친구가 드러머를 구하고 있던 그들에게 Scream의 드러머였던 Dave를 추천한 것이다. 그 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커트의 자살 이후, 그는 한동안 음악과 단절된 생활을 하다가, Nirvana시절 틈틈이 Barrett과 함께 레코딩을 해 놓았던 곡들을 중심으로 1995년 Foo Fighters의 데뷔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그롤 자신이 모든 악기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본인이 부른 원맨밴드 형식의 앨범으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Rolling Stones와 Spin의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100만장이 넘게 판매되면서, 1996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고의 신인 아티스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그와 후에 결성된 Foo Fighters에게 안겨주게 된다.
Foo Fighters의 1집 는 Nirvana적인 사운드에서 한 발 나아가, 기타의 기본 멜로디에 더욱 밝고 하모니가 가미된 음을 구사하고 있다. 앨범의 오프닝곡인 “This is a Call”은 비틀즈적인 사운드로 시작이 되지만, 뒤따르는 강렬한 기타소리와 함께 그런지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또한 “Big Me”에서는 Nine Inch Nails적인 면도 맛 볼 수 있다. 비록 Grohl의 목소리가 Kurt의 카리스마에는 못 미친다고 하지만, 강렬한 음악에도 잘 어울리는 가능성이 풍부한 음성을 지녔음을 이곡저곡에서 엿볼 수 있다. 앨범의 백미로 꼽히는 “I’ll Stick Around”에서 아름다운 멜로디와 깔끔한 가사를 강렬한 기타리프와 포효하는 보컬로 표현해 내 Beatles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Nirvana의 음악에 융화된 듯하다는 평을 들었다.
1997년 발표된 2집 앨범 또한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롤은 이제 커트의 그림자를 벗어난 독자적인 음악인으로 커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어떤 앨범으로 다시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할 지 한 번 기대해보자.
Foo Fighters 관련 사이트 : http://www.foofighters.net
혼자서도 아름다운 보석 Courtney의 Hole
Hole하면 생각나는 이름은?? Courtney Love (커트니 러브)!!
커트니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Kurt Cobain (커트 코베인)!!
이 공식은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공식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이걸 잊어 보도록 하자. 그녀가 커트의 부인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커트가 그녀의 앨범에 곡을 써준 것도 아닌 이상 기어이 Hole의 음악을 들으면서 커트를 기억해 낼 필요가 있으랴… 커트니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데 커트가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제부터는 커트없는 커트니 이야기를 해보자. Hole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이 밴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커트니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됨이 옳을 듯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인터뷰중에 거짓말을 밥먹듯 하기로 유명한 여자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진실이다!!’라고 통하는 이야기들을 간추려볼까나…
12살에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그녀는, 16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집을 나서면서 그녀의 음악과 삶을 수놓는 그 화려한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시작부터 화려하군요… ^ ^ )
할머니가 물려주신 유산으로 아일랜드, 일본, 대만, 리버풀등을 돌아다닌 커트니는 미국으로 돌아와 Faith No More가 성공을 꿈꾸며 L.A.로 옮기기 전까지 이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Alex Cox감독의 눈에 띄어 “Sid and Nancy (Sex Pistols의 베이시스트였던 Sid Vicious와 여자친구 Nancy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낸시의 여자친구로 영화 데뷔를 하게 되며, 이후 같은 감독의 펑크밴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Straight to Hell”에 출연을 하지만 둘 다 흥행에는 성공을 하지 못한다.
미네아폴리스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Kat Bjelland를 만나 여성그룹 Babes in Toyland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그만 쫓겨나고 만다. -아마 지금쯤은 쫓아낸 걸 후회하겠지?- 하지만 이 때 지금은 커트니의 상징이 되어버린 “10대 창녀”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989년 L.A.로 옮겨온 그녀는 Hole을 결성해 1집 앨범 를 발매했으나 그리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같은 해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인기를 얻자 시애틀에서 커트를 한 번 본적이 있는 그녀는 멤버들을 선동(?)해 Nirvana의 공연장을 찾고, 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결혼 후, 성공을 위해 남자를 유혹했다는 사람들의 악평에 “원하는 걸 가지는 건데 그게 뭐가 나쁜 짓인가요?”라고 당당히 대답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커트와 결혼을 하면서 상승세를 타게 된 커트니와 Hole의 인기는, 그녀가 임신도중 마약을 복용했다는 소식이 들려지면서 급격한 하향세를 탄다. 더욱이 1년여의 결혼생활 후 커트가 다시 마약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는 자살을 하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언론의 표적이 된다. -커트니의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서 커트의 이야기를 뺄 수는 없군요.-
커트의 유서를 보고는 “바보자식 (asshole)”이라고 내뱉었다는 그녀는, 비탄에 빠진 미망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랬던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고는 그가 죽은 지 일주일 후에 Hole 최고의 앨범 를 발표한다. 하지만 Sonic Youth와 Smashing Pumpkins의 영향이 느껴지면서도 그녀의 반항적이고 내지르는 듯한 보컬과 힘찬 기타리프에 싸여 사람들을 꼼짝없이 사로잡는 곡들로 가득 찬 이 앨범은, Rolling Stone, The Village Voice, 그리고 Spin에 의해 그 해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하며 미국 전역을 강타하게 된다.
의 성공 이후 그녀는 영화계에 다시 진출하였고, Feeling Minnesota, Basquiat뿐만 아니라, 그녀를 골든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후보”에까지 오르게 한 The People vs. Larry Flint에 출연하면서 사람들에게 영화배우로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영화배우가 되면서 예전의 이미지를 버리고 선택한 섬세하고 단정한 베르사체식의 이미지는 그녀의 평판을 높이는데 커다란 몫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커트니는 커트니다워야 멋지지 않나요?-
오랜 외도를 마치고 1998년 9월 8일 발표된 Hole의 3집 앨범 은 그녀 특유의 저항적이고 분노에 찬 듯한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유로 악평과 찬사의 양 극단을 오갔지만, 여전히 자신이 느끼는 세상에 대해 읊조리는 그녀의 이야기는 변함이 없다.
혹자는 그녀가 여성 운동가이다라고 칭하고 (“Every time that I sell myself to you/ I feel a little cheaper than I need to 너에게 나를 팔 때마다/ 난 진짜 나보다 조금은 더 싸구려같은 느낌이 들어”), 어떤 이는 그녀가 시대의 조류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사람에 불구하다고 칭하지만, 그녀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든 간에 커트니는 분명 시대의 관습과 금기를 깬 여성 아티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hole 관련 사이트 :http://www.acidstar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