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펑크”라는 음악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된 것을 햇수로 따지자면 몇 년 되지 않는다.
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씬이 포크나 락 등 일정한 장르적 색채를 지키며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간 것에 비해, 9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인디 음악 씬은 전혀 새로운 장르와 시도가 혼합된 다종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약진을 한 것은 아무래도 “펑크”일 것이다.
(‘인디 음악=펑크’ 혹은 ‘클럽=드럭’이라는 도식은 진실에 대한 왜곡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펑크 음악과 드럭이 인디 음악 내에서 차지했던 위치가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단순한 코드와 못하는 듯 들리는 연주와 황당한 가사’ 등으로 왜곡되게 알려지기도 한 국내 펑크는 홍대 앞 “드럭 공화국”을 중심으로 그 흐름을 확산시켜 왔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펑크는 그 나라에서는 기성의 질서에 대한 반란이자, 노동계급 출신 아이들의 국가전복(!)에 가까운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 뒤늦게 상륙한 펑크는 기성 음악계의 상식을 뒤짚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펑크 본래의 ‘정신’을 무시하고 뛰어 넘었다는 점에서 ‘펑크’의 모습을 한 이종異種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원래 펑크 음악은 70년대 당시 젊은 세대의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에 기댄 체제비판이었고, 히피의 낭만주의에 반하는 디스토피아Distopia 정서의 표현이었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다른 만큼 펑크라는 장르가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펑크 음악이 단순히 음악 장르가 아닌 삶에 관한 태도이며, 정신이라는 원칙을 떠올렸을 때,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펑크의 대부분은 ‘원칙없는 스타일’에 불과하다.
1999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펑크 음악이 담아야 할 내용은 부유하는 젊음의 무기력증, 그리고 사회 현실을 보면서 느끼는 솔직한 욕설이어야 하지 않을까.
‘펑크가 뭔지 모르지만, 펑크를 하고 있고, 펑크를 할 거’라는 이석문씨의 되풀이 되는 말대로 라면 이 땅에서의 펑크는 ‘아무 것도 아닌 무언가’일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국내에 존재하는 인디 펑크 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조선펑크”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쓰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드럭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조선 펑크”라는 타이틀로 발매되기도 하였다.
“조선 펑크”?
“노 브레인”의 이성우에게서 처음 나왔다고 전해지는 이 단어는 의도했던 의미와 상관없이 현재 펑크씬에서 다소 변명처럼 쓰여지고 있다.
노 브레인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들이 얘기하고자 했던 “조선 펑크”란 것은 본고장 펑크의 형식이나 내용을 넘어서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진 펑크 음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디 펑크 씬에서 조금은 다른 ‘태도’와 ‘음악’을 보여주고 있는 노 브레인을 제외한다면, 다른 펑크 밴드들의 펑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무언가’다. 펑크의 외양과 스타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펑크는 ‘무의미한 파격’밖에 되지 못한다.
신선한 발상, 솔직한 얘기의 테두리가 개인적인 이야기의 발설에만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펑크야?”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게 바로 조선 펑크야.”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조선 펑크’란 게 존재한다면, 존재해야 한다면, 적어도 한국에서 펑크의 자리가 무엇인지, 펑크가 견지해야할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그런 고민을 먼저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피카소의 그림이 당대의 상식을 뒤집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았던 이유는 그 그림이 단순히 ‘새로웠던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낙서같은 그 그림들 이전에 그가 보여줬던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그의 새로운 ‘의도’와 ‘철학’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펑크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조선 펑크”에 대한 크라잉 너트의 이야기는 이렇다.
“근데 그 펑크란 게요, 사람들이 많이 공부하면 할 수록 느끼는 거는 아마 허무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공부한 거는 미국이나 영국 펑크 씬이지, 그 사람들이 우간다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같은 펑크 씬에 관해서는 모를거 아녜요. 거기서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펑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요, 한국의 펑크 씬을 우리가 그냥 그냥 우리는 펑크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외국 거랑 비교하다보면 나름대로 유치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런 걸 상관하기 이전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되는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그런 걸 사람들이 연구를 하면 되지 않겠나, 더 좋지 않을까…”
— 크라잉 너트 이상면, 서브 1999년 2월호 중에
“조선 펑크”란 단어가 더 이상 인디 펑크의 진정성에 대한 변명의 답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조선 펑크”는 오히려, 대한민국 인디 씬내에 존재하는 펑크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하는 단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만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펑크, 한 개인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반영하는 패러다임paradigm으로서의 펑크, 기성의 지리멸렬한 가치를 시원하게 뒤집을 수 있는 펑크가 바로 “조선 펑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편견을 감히 드러내자면, 노 브레인의 『청춘 구십팔』이야말로 “조선 펑크”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앨범이라고 여겨진다. 이 앨범에서 노 브레인은 ‘연주를 못하기 때문에’ 펑크 음악을 한다는, 펑크 음악에 관한 세간의 비난을 일축시킬 만큼 감동적이고 진지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의 정서에 맞는 새로운 스카-뽕짝 사운드와 함께, 밑바닥 인생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절절한 가사말을 통해 마구잡이식 가사가 횡횡했던 여타의 어떤 밴드보다 더 ‘펑크적인’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나 서울로 올라온 지 3년 그저 겁없이 달려들었지
뜻대로 되는 건 없어도 오기 하나로 뒹굴던 날들
힘겨운 때도 많았지 하지만 꿈이 있었지
희망찬 낸일을 꿈꾸며 마냥 그렇게 행복했어
서울 3년 이젠 알 것 같아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네
세파에 찌들고 짓밟히며 나는 이렇게 길들여졌지
짓밟히고 싶지 않다면 짓밟고 올라서야지
이젠 짓밟고 올라서리 나도 이제는 그렇게
탐욕에 눈먼 개떼들은 서로 다투며 먹이를 찾고
힘없는 말라깽이들은 그저 밟히며 먹히고 말지
나 이제 개가 되어가리 짓밟고 휘두르리라
나 이젠 개가 되어가리 나도 이제는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