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헤비메탈 부흥기가 지난 후, 우리나라에는 한동안 락 음악 침체기에 들어갔다. 젊은이들을 위한 서브문화(sub-culture)가 존재하지 않는 공백기가 몇 년 동안 지속된 후, 다시금 슬금슬금 고개를 쳐든 언더의 클럽들은 97년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그 힘을 지니게 된다.
클럽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신생 밴드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신생 밴드들 만큼이나 클럽의 활성화에 힘을 얻은 사람들은 바로 잠시 쉬고 있던 선배밴드들이 아닐까.
자신의 동료들이 꾸준한 활동으로 고정팬을 만들고 (시나위, 블랙홀), 솔로로 데뷔해 성공을 누리고 있을 때 (김종서, 임재범, 서태지) 그들은 예전의 이름을 버리지 않으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러한 밴드들의 오랜 노력이 현재 앨범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오랜 침묵을 깨고 앨범을 발표한 밴드는 토이 박스 Toy Box, 제로지 Zero-G, 클럽 The Club 모두 세 팀. Acoustic Dream이라는 앨범을 발표하며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블랙 신드롬까지 포함하면 모두 네 팀이다.
이러한 밴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밴드의 멤버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바뀌었다는 것이다. 토이 박스의 김병삼, 제로 지의 김태영, 클럽의 민치영, 블랙 신드롬의 김재만이 바로 그 인물들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시나위 같은 밴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위에 언급된 인물들은 밴드의 리더역할을 하고 있으며, 맡고 있는 포지션도 보컬 혹은 리드기타리스트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밴드의 색깔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작곡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신보를 들어보면 몇 년 동안 이들의 음악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를 밴드별로 한 번 살펴보면, 민치영의 경우는 클럽 활동이후 자신이 택했던 노선을 조금 더 발라드한 방향으로 바꾼 듯 하다. 그의 2집 앨범에서 민치영은 극도의 미성을 이용해 오감을 자극하고 있다. 노래 또한 아름다운 발라드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리메이크 곡 “안녕”은 무척이나 감미롭다.
블랙 신드롬은 거칠던 사운드가 세련되어졌다는 점에서 고무스러운 일이다. 성숙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재만 이라는 기타리스트의 1인 독주체제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계속되었음에도 관습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가지 서운한 것은 음악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팬층이 확보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올해 발표된 노장들의(?) 앨범 중 가장 흥미로운 건 토이 박스와 제로 지의 앨범이다. 토이 박스의 보컬리스트인 김병삼이 제로지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해주시길..
토이 박스와 제로 지는 올해 들어 몇 달 간격으로 앨범을 발표했다. 토이 박스는 “부작 符作”이라는 이름의 2집 앨범을, 그리고 제로 지는 “행복해야 돼”라는 이름의 3집 앨범을..
이 앨범에는 그 동안 이들이 느꼈던 음악인으로서의 고뇌가 느껴진다. 또한 이 살벌한 음악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택한 음악적인 노선도 언뜻 보이고..
토이 박스가 택한 길은 그들이 1집에서 언뜻 보였던 Mixture Rock 믹스쳐 락의 극대화이다.
펑키한 리듬과 L.A. Metal 그리고 하드코어의 절묘한 조합은 앨범 속에서 잘 섞여서 마치 맛있는 퓨전요리를 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멤버들의 뛰어난 연주실력이 뒤를 받치고 있어서 허스키한 -솔직히 맛이 간 듯한 느낌이 드는- 김병삼의 목소리를 훌륭하게 뒷 받침하고 있다.
제로 지의 경우는 토이 박스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했다 볼 수 있다. 1집과 2집 앨범에서 빠른 기타 연주와 파워풀한 메틀음악을 보여줬던 그들은 이번 3집 앨범에서 평범한 락 발라드 밴드로서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 앨범은 락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대중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앨범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태영이라는 뛰어난 기타리스트의 7년 동안의 세월이 절대 튀지 않는 평범한 사운드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제 그들은 다시 이 거친 언더그라운드 음악 세계에 다시 발을 들였다. 젊고 혈기에 가득찬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번뜩거리고 있는 이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힘있게 대처해 나갈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10년의 세월동안 자신이 처음 택한 길인 음악만은 절대로 놓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만은 박수를 보낼 일이다. 음악을 젊은 한 때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인생으로 여기는 많은 밴드들이 배울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들의 행보를 보고 더 많은 옛 밴드들이 돌아왔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돌아와라~~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