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문득 운전을 하며 내가 들어와던 노래를 생각해 본다. 그동안 줄기차게 가요만 들었었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아니지 한국말이 익숙하니까.
얼마전부터 다시 Bob Marley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난 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가 자메이카 태생이란 것과 레게의 뿌리라는 것, 그리고 마리화나를 즐겨 피웠었다는 것. 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 뭐 이정도, 남들도 나만큼은 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뮤직 비디오를 보며, 음악의 생명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혁명가보다도 더 치열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가. 그의 노래 (난 그의 앨범 ‘Survival’을 자주 듣는다.)는 무언가 주장을 하고 있다.
첫번째 노래 ‘So much trouble in the world’에서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의 두 번째 노래인 ‘Zimbabwe’에서는 그의 형제들인 아프리칸들에게 그들의 꿈의 나라인 짐바브웨,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맞다고. 싸우라고 싸워야만 한다고, 싸울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모든 노래는 자유와 그것을 위한 투쟁을 이야기 한다. 그는 진정 그의 나라인 자메이카와 그의 마음의 고향인 아프리카를 사랑했고, 그들의 자유를 제국주의자로부터 지키려 노력했다. 그것은 그의 노래의 생명축이니까.
난 레게가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의 생명인 저항정신이 있었기에 레게는 지금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은 ‘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혹자는 그것이 삼류문화, 또는 자본주의의 쓰레기 문화라고, 저급한 흑인 문화라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들을 보라, 그들은 저급 문화라해도 적어도 저항 정신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우리나라의 레게와 랩을 보자.
그 음악에 저항 정신이 있었는가? 그 음악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가수나 작곡가가 그 영혼도 가지고 왔는가? 그 음악의 뿌리를 보지 않고 그 음악이 쓰레기라고 논하지 말라. 적어도 그들은 삶의 저항의 하나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 .
노래나 문화,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감성을 자극하는 사랑타령이 건강한 노래인가? 삶을 노래한다는 것. 이것이 노래가 할 일이다.
난 오늘도 Bob Marley의 노래를 들으며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나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용기가 나는 것은 아직까지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서일까?
글 : IskraKor@aol.com
더운 여름날,
메일 한 통이 왔다.
그 메일에는 밥 말리에 대한 애정 어린 글이 씌여 있었다.
레게…그리고 밥 말리.
최초이자 유일했던 레게의 세계적인 스타 밥 말리.
그리고 그가 돌아가기를 꿈꾸었던 마음의 고향, 아프리카.
한때 우리나라에 레게의 열풍이 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천박한 유행은 레게 바며, 레게 스타일의 옷이며 악세사리, 레게 머리, 인기 있는 가수들의 레게 리듬이 들어간 노래들 만을 남기고, 영혼도 정신도 없이 그렇게 껍데기만 왔다 갔다.
레게의 황제 밥 말리의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 유행이 한참 지나고 나서 지금 다시 레게를 생각해 본다.
레게는 알다시피 자메이카의 음악이다.
미국의 흑인들에게 ‘블루스’라는 한풀이 음악이 있었다면, 자메이카의 흑인들에게는 레게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자메이카의 흑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민속 음악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리듬 앤 블루스가 섞이면서 형성된 레게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1940~50년 경에 탄생된 레게가 하나의 음악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1960년대이고, 이 장르의 개척자는 다름 아닌 밥 말리이다.
레게의 음악적인 특징은 리듬 앤 블루스의 끈적거리는 느낌과 스카의 쿵짝거리는 흥겨운 리듬이 함께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레게가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매우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것인데, 이는 자메이카라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그 당시 흑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 가능하다.
남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고 있는 섬나라인 자메이카는 인구의 90% 이상이 흑인 임에도 불구하고 10%도 안되는 백인들이 대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해 왔다. 레게는 백인 지배층에 대해 흑인들이 자신들의 민속음악으로 저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밥 말리의 레게 음악에 담겨진 내용의 대부분이 자메이카 흑인들의 궁핍하고 비참한 현실이나 세계 흑인의 불평등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밥 말리 역시 자메이카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 가지로 비참한 현실에서의 탈출 수단으로 음악을 선택했고, 그는 레게를 통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의 궁극적인 해방을 꿈꾸었던 것이다.
레게의 황제 밥 말리
본명 : 네스타 로버트 말리Nesta Robert Marley.
밥 말리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세인드 앤 교구에 있는 나인 마일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의 해군 장교였으나 밥 말리의 어머니가 열일곱 살의 나이로 그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그녀를 떠나버렸다. 밥 말리는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킹스턴으로 갔지만 일년 만에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몇 년 후 밥 말리와 그의 어머니는 웨스턴 킹스턴에 있는 슬럼 지구에세 생활을 하게 된다.
도시의 법석거림, 팻츠 디미노나 레이 찰스의 음악, 당시 생성됐던 자메이카의 ‘스카’ 등은 밥 말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열여섯이 되던 때, 밥 말리는 레코드를 취입하려고 한다.
지역 뮤지션 지미 클리프가 소개해 준 ‘레슬리 콩’이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낸 그의 최초의 싱글은 “Judge Not”이었다. 그리고 이어 두 번째 싱글 “One More Cup Of Coffee”도 내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프로듀서 레슬리 콩과 결별하게 된 밥 말리는 1964년 피터 토쉬, 버니 리빙스톤, 주니어 브레이스 웨이트, 비벌리 켈소, 체리, 콘스탄틴 워커 등과 함께 “Wailing Wailers”를 결성한다.
이것이 바로 “Wailers”의 전신이었다.
자메이카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담긴 이라는 최초의 히트곡을 낸 이들은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해산을 한다.
이후 피터 토쉬와 버니 리빙스톤과 다시 합류한 밥 말리는 “Wailers”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레게 프로듀서인 ‘리 스크래치 페리’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한다.
이 때 나온 것이 레게의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 , , 등의 곡들이다.
1972년 드디어 밥 말리와 웨일러스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는 일이 발생했다.
세계적인 레코드사인 “아일랜드 레코드”에서 ‘웨일러스’의 앨범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레코드사에서 ‘레게’ 앨범을 내기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일랜드 레코드사에서 낸 “웨일러스”의 첫 앨범은 등이 수록된 『Catch A Fire』이다.
이 앨범에는 자메이카 슬럼가에서 사는 흑인들의 현실과 군대의 억압에 항거하는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의 노래들이 실려 있었다. 이제 세계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섬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레게 리듬과 밥 말리라는 젊은 영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웨일러스”는『Natty Dress』를 내고 전세계 순회 공연을 떠났다.
그들의 레게는 이미 자메이카의 음악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악이 되어 있었다. 영혼을 울리는 밥 말리의 레게 리듬은 말 그대로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이즈음 피터 토쉬와 버니 리빙스턴이 팀 탈퇴를 했지만, 밥 말리는 여전히 “웨일러스”에 남아 “웨일러스”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밥 말리가 낸 『Rastaman Vibration』(1976)과 『Exodus』(1977), 『Kaya』(1978)는 세계적인 그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앨범 『Suvival』(1979)의 발표와 함께 밥 말리는 유럽으로 순회 공연을 떠나게 된다. 그의 레게는 가는 곳 마다 무수한 청중들을 불러들였고, 그의 음악에 담긴 저항적인 메세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유럽 공연을 끝내고 돌아온 밥 말리가 쓰러진 것이다. 진단 결과는 뇌종양이었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밥 말리에게 주어진 삶의 나머지였다.
여덟달 동안 죽음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그가 죽은 것은 1981년 5월 11일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 여섯. 레게의 살아있는 영혼, 레게의 저항시인 로버트 네스타 말리의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밥 말리가 불렀던 수많은 노래들에는 그가 믿었던 “라스파타리”교의 신념이 묻어나 있었다.
그는 흑인의 궁극적인 해방과, 아프리카로의 복귀를 꿈꾸었다…
지금도 레게라는 장르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유명한 레게 뮤지션이 있고(“UB40” 등), 여러 장르의 뮤지션들이 레게 리듬을 그들의 음악 속에 녹여 내어 나름의 개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밥 말리를 유일한 레게의 세계적 슈퍼스타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그를 필적할 만큼 레게 속에 영혼과 저항정신을 담아내는 뮤지션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 속에 가득한 슬픔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 밥 말리의 음악은 그가 간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심장을 울리는 레게 리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