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뮤지션(가나다 순) :
아무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허벅지 밴드, 황신혜 밴드
허벅지 밴드, 아무밴드, 황신혜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이들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게 뭐가 있을까?
이 네 밴드가 가질 수 있는 공톰점이란 건, 어느 장르에도 선뜻 묶기가 망설여 진다는 점과 실험성이 강하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 ‘실험성’의 형태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신혜 밴드와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의 경우에는 상식을 깨는 음악과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허벅지 밴드 역시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을 많이 가졌지만, 무엇보다 일정한 컨셉에 따라 음악의 변화가 대단한 폭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에 관심의 촛점이 모아진다.
아무밴드의 경우 “싸이키델릭 팝”을 지향한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다양한 음악적 토양을 가진 이들의 음악은 쉽게 해석될 수 없는 여지를 남긴다.
이들 각자가 지향하는 음악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지향점이 이미 존재하는 장르나 연주 스타일, 사운드에 맞춰지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밴드의 음악은 뒤에 거론할 다른 세 밴드들의 음악에 비해서 가장 ‘정상적인'(?) 외양을 보여준다. 그들의 음악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키치kitsch나 과장되게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랑은 일정한 거리가 있다.
아무밴드 음악의 개성은 가사의 문학성과 사운드의 회화성이다. 기형도의 문학이나 유리된 자로서의 정서, 삶의 어두운 이면을 표현하는 가사의 미학은 검푸른 색채의 사운드와 함께, 화두처럼 듣는 이의 심장을 점령한다. 아무밴드는 또한 일정하게 고여있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하고 자기화한다.
포크에서 얼터너티브, 싸이키델릭까지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준 사운드들을 ‘느낄 수는 있지만’, 열려진 태도를 가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운드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다.
그들의 공연은 레코딩된 사운드가 박제로 느껴질 만한 파워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특히 등의 즉흥적인 연주와 노래는 제의식 혹은 참여한 사람들과의 일치된 호흡을 끌어내는 주술적인 형태를 띤다.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는 한없이 절망적이고 기괴한 사운드로 듣는 이를 ‘괴롭히는’ 음악을 들려준다. ‘음악’이라고 말하기가 뭣할 정도로 기본적인 공식이나 형태를 아예 무시한 이들의 음악은 황신혜 밴드와 같은 선에서 출발한 것이면서 동시에 전혀 이질적인 낯선 존재이기도 하다.
이들의 음악은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읽어내야 하는’ 난해하고 모호한 텍스트다.
고기를 잡는 사람 漁夫, 고기의 아버지 魚父 둘 다를 의미하고 있는 이들의 모순된 이름처럼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조직된 모순이다.
끽끽거리는 보컬과 톱 소리, 타악기 소리, 멜로디가 들어있지만 한없이 음울한 기타 사운드, 소름끼치는 나레이션만으로 구성된 트랙, 이상 李箱의 시, 혹은 카프카의 문학 혹은 더 어두운 어느 ‘저자’의 시를 연상시키는 텍스트들은 그 자체만으로 일정한 무게를 지닌다. 신경 거슬리는 각종 ‘음향’들과 함께.
황신혜 밴드가 한없이 가벼워지는 방식으로 세상의 모순을 비웃었다면, 어어부는 오히려 더 모순되고 불쾌함이 의도된 방식으로 우리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들의 공연은 이런 불편, 불안을 우리에게 더 가혹한 방식으로 부과한다. 파랗거나 빨간 어두운 조명의 사각 링 안에서, 혹은 겹겹이 둘러쳐진 천 안에서 으스스한 모습으로 뭔가를 두드리고, 읊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복지, 건강, 희망’이라는 ‘인스턴트 꿈’을 무참히 깨버리는 세기말의 저승사자 같기도 하다.
허벅지 밴드는 1집 [허벅지 댄스]에 수록된 , , 등의 노래로 “몸”에 대한 금기와 터부를 과감히 깬 밴드이다. (이들의 ‘엽기적인’ 노래말은 방송가에 “잔혹 가요 파문”을 불러 일으키키도 했다. 바로 이 주인공)
그들의 사운드는 국내 어떤 뮤지션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는 아무밴드나 황밴드, 어어부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바이얼린의 신경질적인 선율이 흐르다가 바로 디스코 풍의 멜로디나 심각한 기타 사운드가 출현하거나 펑크 사운드를 제멋대로 일그러뜨려 배열하는 식의 허벅지 1집의 사운드는 오히려 70년대 아방가르드 락쪽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으나, 2집 발매에 앞서 나온 싱글 앨범을 듣노라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허벅지 3기를 맞아 이번에 제시하는 그들의 음악은 단순하고 산뜻한 느낌의 ‘모던 락’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모더니티를 “비”를 매개로 표현하고 있는 최근 허벅지의 음악은 예전과 전혀 다를 뿐더러 다소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급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서 상큼한 모던 락 사운드까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허벅지. 허벅지가 가지는 개성은 고정된 형태를 띤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나 예상을 뒤엎는 데 있다.
황신혜 밴드는 ‘음악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상식을 뒤집고, 의도적인 유치함과 ‘가벼운 놀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음악을 제시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기발한 공연 모습이나 장난스럽고 독특한 가사와 사운드는 분명 새로운 것이었고,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삶의 엄숙함]에 대해서 전복적인 상상력과 낄낄거림으로 맞서려 했던 게 이들의 의도였다.
무의미한 듯 들리는 그들 노래의 가사말이나 사운드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엄숙함이 지배하는 사회의 경직된 모습에 대한 빈정거림이다. 게다가 그들에 의해 시도된 연출된 유치함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반예술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이 수록된 1집이 전반적으로 ‘진지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증을 앓고 있는 대중음악과 문화에 거는 딴죽이었다면, 2집은 촌철살인의 가사와, 흥겨운 헤프닝같은 사운드의 노래들도 있지만 그저 웃고 넘어갈 수 만은 없는 삶의 어두움에 대한 우회적 진술이 넘쳐난다.
이런 ‘우울함’이 내비치는 황신혜 밴드의 변화는 2.5집인 “특별시 소년소녀”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단편영화와 함꼐 제작된 이 앨범에서 황신혜 밴드는 테크노, 얼터너티브, 싸이키델릭, 디스코 사운드까지를 차용하고 있거니와, 영상이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복합대중문화로서 자신들의 음악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무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허벅지 밴드, 황신혜 밴드의 음악은 인디냐 오버냐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우리나라 대중 음악의 다양성과 미래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선진적이다. 각자 뚜렷한 개성과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이들의 음악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소피스트’들의 궤변처럼 사회의 상식과 가식을 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 또한, 급진적이다.
하나로 묶어서 얘기 하기가 망설여졌던 이들 각자의 독특한 색깔들.
아름답고 불편하고 재미있고 황당하고 우울하고 중독되기 쉽고 자유로운 이들의 음악은, 인디 내의 인디라는 이름으로,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는 그런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위에서 거론된 밴드들 말고도 장르와 유행에 상관없이 개성과 선구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밴드들이 더 많을 것이다.
코코어나 레이니 썬, 노이즈가든 등의 밴드가 바로 그러할진대, 기사의 흐름상 과감히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