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우리 나라에서는 첫 ROCK 페스티발이 개최됐고, 락 매니아들에게 이일은 최고의 설레임 이었다. 이 페스티발이 성공적으로 끝마쳐지기를 다 함께 바랬었지만 안타깝게도 ’99 TRIPORT ROCK FESTIVAL’은 최악의 실패로 마감돼 버렸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락페스티발의 대명사인 ‘우드스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최대의 성공작인 ‘우드스탁69’를 다시 한 번 둘러보면서 언젠가는 우리 나라에도 이런 성공적인 ROCK 페스티발이 개최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우드스탁 69는
John Robert, Joel Rosenman, Artie Kornfeld, Michael Lang에 의해서 시작된다.
Drug store와 치약을 생산하는 공장의 상속자인 John Robert와 에일 법대를 나왔고 이것 저것 여러 가지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친구 Joel Rosenman은 자신들의 남은 인생에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Capital Records’사의 부사장인 Artie Kornfield와 1968년 ‘Miami Pop Festival’을 개최했던 Michael Lang 이 대항문화의 정신을 반영할 문화 박람회와 락콘서트를 포함하는 페스티발 개최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해 옮기고자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페스티발을 그 시대 아티스트들의 메카인 우드스탁에서 맨하탄으로 이어지는 100마일 이상의 숲에서 개최하고자 하고자 했다. 이런 계획을 가지고 투자가를 찾던 이들은 마침내 1969년 2월 Robert와 Rosenman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들은 1969년 3월 ‘Woodstock Ventures, INC.’을 차리고 우드스탁 페스티발을 준비하게 된다.
이들은 전쟁과 폭력에 반하는 락 페스티발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These Days of Peace and Music”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러 매체에 홍보하면서 페스티발을 하나하나 준비해 간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우드스탁 지역에 사는 주민들과의 마찰도 심했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격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Max Yasfur라는 사람의 농장(Max Yagur’s Farm –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 곳은 우드스탁 지역은 아니고, 우드스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개인의 농장이다)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발’을 열기로 한다.
여기에도 많은 어려움들은 있었지만, 이들 특유의 수단(이들의 수단은 공교롭게도 뇌물공여였다…^^;)으로 어려움 들을 극복해 냈고, 1969년 7월에는 이들이 기획한 우드스탁 콘서트가 사상최대규모(처음 그들의 의도보다 기획하는 과정에서 규모는 예상보다 커져 버린다)의 락 페스티발로 이미 미국 전지역에 알려진다.
처음에 이 우드스탁은 18달러 유료 콘서트로 기획됐었다. 하지만 예매 첫날부터 20만 매에 가까운 입장권은 매진됐고, 입장권을 미처 구입하는 못한 사람들이 우드스탁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관중들은 무려 200만에 가까웠고(이후 3일 동안 우드스탁을 지킨 사람들은 수는 50만 명이다) 바리케이트는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주최측은 어쩔 수 없이 우드스탁을 무료 공연으로 선포하게 된다.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 동안의 ‘우드스탁 페스티발’.(사실상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이 18일 오전 10시 30분까지 계속 됐기 때문에 4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결 Togetherness’를 내 건 60년대 최후의 대 이벤트가 됐고, 우드스탁에 참가했던 좌익운동가 애버 홀먼Abby Halman은 우드스탁 페스티발과 거기에 참가한 관객들을 ‘우드스탁 공화국Woodstock Nation’이라 이름 붙인다. 이들은 우드스탁을 단순한 락 페스티발이 아닌 “문화 대혁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드스탁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청중이 모여든 탓에 공연장은 식량, 화장실, 의료설비 등 모든 게 부족했고, 이틀째 되는 날 밤에는 긴 폭우가 퍼붓는 악조건 마저 겹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페스티발 참가자들은 식량과 약을 서로 나눠 쓰며 평화적으로 페스티발이 끝나도록 마음을 한데 모았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60년대 대항문화로 대표되는 긴 머리에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던 히피들과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전미 지역의 젊은이들은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런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페스티벌을 평화적이고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찰스 라이크는 그의 책 『녹색혁명 Green Revolution』에서
“이 혁명은 새로운 세대의 반혁명이다. 그들의 항의, 반란, 문화, 복장, 음악, 사고 방식, 해방된 라이프 스타일 등은 그저 한때의 변덕이 아니다. 그리고 단순한 이의 제기나 거부하는 몸짓도 아니다. ‥‥‥ 머잖아 젊은이들 뿐 아니라 미국 모든 이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 할 정도 였다.
우드스탁의 성공은 도시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과 베트남 반전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운동의 고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드스탁은 단순한 락 페스티벌이 아니었고, 그 공연과 참가자들이 “우드스탁 네이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드스탁 네이션’의 반항은 막연했던 50년대 틴에이저의 반항에 비해 훨씬 의식적이고 지성적이며 확고한 체계를 지닌 문화운동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