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완 씨와의 인터뷰를 위해 동교동에 있는 시완 레코드를 찾은 늦은 여름날… 마치 요새처럼 수많은 아트락 앨범이 쌓여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2시간 30분 가량의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프로그레시브 락과 아트락의 전도사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그와의 대화를 시작해 보자.
블루노이즈(이하 “블”로 표기) : 아주 기본적이고 구태의연한 질문을 먼저 할까한다.
성시완씨는 프로그레시브 락, 아트락의 개념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정의를 내린다면…?
성시완(이하 “성”으로 표기) : 프로그레시브 락은 장르가 아니다. 평론가들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할 때 썼던 말이다.
역으로 악기 구성은 아주 트레디셔널하다. 민속악기라든지 고전악기 그런 것들을 많이 도입해서 사용한다. 프로그레시브 락이 발달을 하는데 레코딩 기술, 악기의 발달 등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트락은 뭐냐면,
… 아트락은 장르다. 근데 프로그레시브 락을 포용하는 장르다.
영국의 아트스쿨 주변에서 발생했다. 주변의 재즈바나 클럽 등에서 순수예술을 배웠던 학생들이 락이나 재즈라는 다른 문화를 접하고 그것들을 섞어서 연주하게 되는데, 미학적인 개념으로 아트 스튜던트들이 하는 락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아트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은 아트락이나 프로그레시브 락은 싸이키델릭락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발전한 시기도 비슷하다. 물론,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싸이키델릭 락의 영향을 아트락이 훨씬 많이 받았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독일 프로그레시브 락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프로그레시브 락을 했 던 사람들 대부분이 일렉트로닉스 악기를 쓰는 뮤지션들이었다.)
(여기서 잠깐,
“싸이키델릭 락”에 대한 성시완씨의 한마디…
싸이키델릭 락은 1960년대 중반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동한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킨 어떤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참으로 많은 걸 실험했다. 뮤지션들이 마약같은 것들을 사용했는데, 맨정신에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곳을 다른 걸 이용해서 도달할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게 병폐적인 것도 낳긴 했지만…히피들의 정신을 추종하고 그런 것이 사실은 싸이키델릭 락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를 외치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자유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 “플라워 무브먼트”가 히피들의 정신과 싸이키델릭락의 정신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
블: 성시완씨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까, 얼터너티브 락의 경우에도 장르로서의 얼터너티브가 있지만 태도나 정신으로서의 얼터너티브도 있다. 그런데, 쓰리코드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음악중에는 전형적인 “얼터너티브” 사운드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아트락적인 요소를 도입한다든지, 여러가지 시도로 “대안”이 되고자 하는 뮤지션들이 많다. 이런 것들이 장르가 아닌 프로그레시브 락의 특징과 비교가 된다…
성 : 얼터너티브는 사실 포지티브 펑크 positive punk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음악 장르를 나눈다는 게…
프로그레시브의 경우도 음악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세부적인 장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아트락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혹은 평론가의 입장에 따라서 그렇게 나눌수가 있는데, 그런 구분 없이 자기 나름대로 들으면서 아, 이건 이러저러한 스타일이고 결국은 아트락이라고 부른다. 뭐, 그럼 되지않나.
한 아티스트만 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향하는 음악 스타일도 변화가 있고, 조류에 따라서 변화가 있고, 장르도 변화한다.
대표적인 경우, 그룹으로 치자면 비틀즈를 예를 들 수 있는데, 비틀즈도 여러가지 변화과정을 거쳤다. 내가 보기엔 비틀즈가 모든 팝이나 락에 있어서 첨단으로 해왔던 팀인 것 같다. 1970년대 초반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 같다. 뭐든지 보면, 멜로트론도 거의 초창기에 썼고, 싸이키델릭락도 그렇고, 심지어 헤비메탈적인 요소, 하드락적인 요소도 비틀즈가 먼저 시작했다고 본다. 백워드 매스킹도 비틀즈가 먼저 했고, 모든 것에 있어서 제일 앞서갔다고 생각한다.
아트락에 있어서도 맨처음에 시도한 뮤지션이 다르고, 최초의 완성된 아트락을 보여준 뮤지션이 다르다.
산울림을 프로그레시브락을 시도한 뮤지션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라고 본다.
그들의 초기 사운드를 싸이키델릭 락이라고들 하는데, 물론, 프로그레시브 적인 요소는 있지만 – 외국인들이 볼 때에는 워낙 우리가 불모지였기 때문에 와, 이거 재밌다, 는 식으로 가상히 여기는 그런식으로 들린다. 내게는.
블 : 그렇다면, 성시완씨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프로그레시브 락을 시도했던 뮤지션은 누구인가?
성 : 동물원에 있던 이성우가 낸 솔로 앨범에 있던 라는 곡을 들었는데, 느낌이 데이빗 보위하고 핑크 플로이드하고 막 왔다갔다했다.
일종의 모방이다.
자기는 모방이 아니라고 이렇게 만들었는데, 만들고 나니까 자기가 어릴적부터 듣던 것들이 나오는 거다. 좋게 얘길하면 그거고, 나쁘게 얘길하면 베낀거다. 광고문구에 보면 최초의 …라고 써있었는데, 최초의 프로그레시브가 그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환웅이란 친구도 있었고, “작은하늘”이란 음반의 몇부분에서도 만만치 않은 프로그레시브 락적인 요소가 나온다. 디지털 더빙이나 그런 게 80년대 그 당시에는 없었던 기술이니까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요소”일 뿐이지 프로그레시브 락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서남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회사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조윤”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프로그레시브 락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앨범이다.
컨셉도 그렇고… 그런데 앨범 제작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본 문제가 아니라 각 나라의 프로그레시브 락마다 그 나라의 특색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앨범은 그런 것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했고, “프로그레시브 락이다”라는 전제 아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에 프로그레시브 락 앨범이 안될 수가 없었다.
누가 뭐라해도 조윤의 앨범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프로그레시브 락을 시도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몇몇 작품들이 있었는데 프로그레시브 락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앨범은 아닌 것 같았다.
블 : 어떻게 음악과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성 :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 카세트가 거의 없던 어린시절에 아홉 종류의 카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녹음하기를 굉장히 좋아했었고, 심지어 선생님이 일기 써오라고 하면 녹음을 해 갈 정도였다. 근데 카세트가 거의 없을 때니까, 반감을 가지는 분들도 계셨고, 쟤는 원래 이상한 놈이니까 하고 놔두시는 분도 계셨고…주위에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도 굉장히 많았고, 집에 가면 제대로 된 책이 없었다. 다 음악관련 잡지였고, 일본판 뮤직라이프와 영화잡지 스크린을 보면서 ‘히라가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타가나’부터 배웠다.
나는 음악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앨범에 있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가만있질 못했다.
그 뜻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전세계 사전, 40여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사전에도 안나오는 단어가 있다. 인명사전, 지명사전들을 다 뒤져서 안나오는 합성어같은 경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했다.
그래도 모르는 경우에는 뮤지션들에게 물어봤다. 뮤지션들은 아는 뮤지션들이 많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찾으면서 다른 분야에 대한 것도 많이 알게 되고,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방대한 지식을 얻게 됐다.
블 : 89년도 방송 때도 기억에 남는 게, 꼭 곡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모습이었다.
성 : 그걸 참지를 못했다.
블 : 사람들에게 추천을 해줄 때랑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있을 것이다. 소개한다면?
성 : 내가 이쪽 음악에 빠져들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뭐냐면,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펜팔을 했었다.
그때는 외국 학생들과 펜팔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었고, 외국의 친구들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때문에 편지를 보내게 됐다. 스웨덴 친구랑 펜팔을 했는데 그 친구가 소개해 준 앨범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에 들었던 게 핑크 플로이드나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 음악에는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하여 모든 음악이 한 곡안에 다 들어 있었다. 그 앨범이 바로 “마누스 어글라Magnus Uggla”의 앨범이었다.
블 : 아주 젊은 나이에(1981년) 학생 신분으로 방송일을 처음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방송일을 하게 된 계기는 어떤건가?
성 : 대학을 선택할 때, 어떤 과를 갈까… 많이 망설였었다.
별보는 게 취미였기 때문에 천문학과는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마지막 선택의 경우였던 학교에 갔을 때 스피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듣고, 원서도 안 쓴 상태에서 방송국으로 찾아가 “이 학교에 들어오면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학교를 들어가고, 필기 시험을 봤는데 다 맞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서, 면접을 봤는데, 건방을 떨었던 나를(^^”) 밉게 봤는지 합격자 발표를 보니 내가 없는 거다.
이건 비리다. 말도 안된다 라고 굉장히 억울해 했다.
그러다가 MBC에서 “DJ컨테스트”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참가 자격이 전문 디제이들은 금지되어 있고 대학생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학교 방송국들의 참여가 대부분일 거였다. 우리학교 방송국에서도 나갈거고… 그래, 여기서 복수하자. 라는 심정에서(^^”) 참가 신청을 하고 그동안 내가 만들어 왔던 작품을 냈다.
거기서 대상을 탔는데, 그 때 MBC에서 대상을 탄 사람에게 새벽 1시부터 2시까지의 프로그램을 하나 맡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컨테스트를 연 것이었다.
그 때 그 방송을 함께 맡았던 피디가 다른 방송일 때문에 바쁘고 해서 선곡 등 모든 것을 내가 다 하게 됐다.
그 때 방송을 내 맘대로 했다. 보통 방송을 잘 타지 못하는 길이의 음악 두 곡만으로 방송을 끝낼 때도 있었고, 한 곡만으로 방송 시간을 채울 때도 있었다. …
방송을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재밌었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 뿐만 아니라 복학생들도 신기해하고… 스타였지, 뭐.
블 :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직접 음악을 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성 : 물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뮤지션인 양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한계가 너무 뚜렷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평론가가 되는 것 같다. 도저히 실력으로 이길 수가 없으니까…
블 : 시완 레코드를 처음 만들었을 때, 계속 음악-특히 프로그레시브 락-과 관련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건지, 아니면…
성 : 내 의지에 의해서 생기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타의에 의해서 하게 되는 일들도 있다.
방송활동을 하면서 아트락이라는음악을 소개했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어떻게 보면 내가 소개한 음악때문인데… 실질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통로는 요원했다.
일종의 책임감도 느꼈다. 내가 뿌린 씨니까 내가 거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 : 이상하게 아트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장르 음악 매니아들보다 자기들끼리 결속력이 굉장히 강하고, 그 반면에 배타성도 강한 것 같다. 그 쪽 사람들은 인텔리적인 성향도 강한 것 같고… 이런 성향은 아트락이라는 음악의 특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인지?
성 : 아트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아주 지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블 : 깊게 파고드는 성향이 강한 것 같은데…
성 :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트락을 들으면서 필요한 것이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지식이고, 여러가지 언어, 은유에 대한 해석과 분석력 등이기 때문일 것이다.
블 : 사전 지식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뜻인가?
성 : 아트락의 성격상 그런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그런 걸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트락의 매력 중 하나이다. 앨범 타이틀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든지…
블 :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성 : 인터넷 방송국.(웃음)
블 : 인터넷 방송국…? (웃음)
성 : 인터넷 방송국이 지금 현재 나의 최대 관심사다.
아직까지 아트락에 관해 인터넷으로 제대로 방송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것이다. 24시간 아무때나 아트락을 들을 수 있게끔 해보고 싶다. 영화도 찍고 싶고…
(참고로 성시완씨의 전공이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는 사실. 한국에 온 이후 찍었다는 그의 ‘아트락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무척 궁금…)
언제나 “프로그레시브”한 시도로 많은 사람들을 놀래켜 온 성시완씨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오프 더 레코드로 진행된 그의 인생과 사랑 등… 진짜 재미난 이야기들을 공개할 수 없는 걸 안타까워 하며, 최초의 아트락 전문 인터넷 방송국으로 조만간 그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 본다.
차분한 말솜씨로 아트락과 프로그레시브락에 관해 무지한 필자의 질문 하나하나에 친절히 답변해 준 성시완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관련 사이트 : Si-Wan Records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