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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와 낸시의 러브 스토리가 재미 있었는지 모르겠다.
흠… 이번에는 ‘우먼파워’를 느낄 수 있는 러브 스토리다. 그리고, ‘리얼 러브real love’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나마 보여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다. … 바로, 6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적 ‘현상’의 주인공인 비틀즈, 그 중에서도 존 레논과 그의 영혼의 동반자 오노 요코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혼의 동반자’ 존 레논 John Lennon과 오노요코 Ono Yoko : It’s Real Love… Real Love
많은 사람들이 했던 질문으로 얘기를 시작해보자.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만남은, (적어도) 비틀즈의 역사에서는 본격적인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존 레논 개인에게나 오노 요코 개인에게는 이 만남의 결과가 행운이었을까? 비틀즈와 함께 했던 10년보다 더 긴 시간을 요코와 지내면서 레논은 행복했을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최대치를 보여준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당사자들에게 만큼은 운명이었고,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노 요코는 1933년 동경에서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은행장이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사교적인 주부였다. 불교 신자인 어머니와 기독교인인 아버지 아래서 그녀는 성서강독과 불교 경전, 서예, 음악, 일본 문화 등을 가정 교사를 통해서 배우며 자랐다. 요코가 18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사라 로렌스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던 요코는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문학에 몰두한다. 그녀의 첫 번째 저서인 [grapefruit]이 바로 그것이다.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상상해 보라. 정원에 구멍을 파서는 그 구름들을 집어 넣어라…’ 이런 식의 추상적 지시가 가득한 이 책은 훗날, 존 레논의 “imagine”에 기본적인 모티브를 제공하게 된다.
그녀는 레논과 만나기 전,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25살 때였다. 그녀의 남편은 줄리어드 음대생인 토시 이치나야기였다. 그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이 결혼은 2-3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6년이 채 안되어 법률적인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다시 결혼한 상대는 행위 예술가이자 영화 감독인 토니 콕스였다. 키요코라는 딸을 낳고 살던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존 레논과 만나면서 깨지게 된다. 훗날 그녀는 이 두 번의 결혼을 “도망”이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한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첫 만남은 1966년 11월 9일에 이뤄졌다. (요코의 나이 서른 셋, 존의 나이 스물 여섯 때의 일이다) 그리고, 몇 년간의 정신적 친구에서 육체와 정신 모두 서로에게 속하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1968년 5월의 일이었다.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육체적인 접촉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결혼 상태에 있던 두 사람의 교류는 요코의 노력과 그에 대한 레논의 응수로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레논이 그녀를 집으로 초대한 날 밤부터 둘은 서로에게 속한 관계로 이틀 이상을 떨어져 본적이 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 유명한 ‘잃어버린 주말’을 제외하면 말이다.
존이 (매력은 있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놀랄 만큼 미인도 아닌) 요코를 사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가 그에게 아첨 떠는 허풍쟁이나 그의 유명세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요코는 진심으로 그녀와 존의 ‘유명세’를 동등하게 생각했고, ‘헤프닝’을 비롯한 그녀의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을 존(혹은 비틀즈)의 노래들 못지 않게 훌륭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런 당당함에 매료된 존 역시 그녀의 작품을 찬미했고, 그녀의 개성과 고집스런 기질을 존중하고 숭배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습게 비쳤을지 몰라도 당사자들은 진심이었다.
요코와의 만남 이후 레논이 더 이상 비틀즈 멤버들을 (예전같이)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매카트니는 말했다. 비틀즈의 다른 세사람은 비틀즈의 멤버가 네 사람인지, 다섯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요코의 존재가 거슬렸다. 왜냐하면, 비틀즈는 마치 형제와도 같은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깨지 못한 그 공고한 관계를 작고 묘한 동양 여자가 와서 헤집어 놓은 것이었다.
비틀즈의 팬들 역시 요코를 레논을 홀린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보았다.
요코와 만난 이후 레논의 행보는 ‘급진적’이고 헤프닝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요코와 행한 “베드-인”시위가 그렇고, 요코와 나란히 선 나체 사진이 있는 그의 앨범 재킷이 그러했다. 음악이라기 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플라스틱 오노’ 앨범의 어떤 곡들은 요코로 인해 그가 이상해져 가는 증거로 여겨졌다.
언론의 집중 포화 속에서, 비방 속에서, 행여 요코가 다칠세라 전전긍긍하는 그의 모습은 ‘비틀즈 신화’ 때의 당당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가 섬약하고 상처입기 쉬워 보이는 이유가 요코를 보호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란 걸 안 팬들은 더욱 분노했다. 그 화살이 어디로 갔을 지는 안봐도 훤하다…
하지만 요코를 항상 보호하려는 이런 레논의 태도는 아이러닉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요코는 매우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레논이 그녀에게 끌린 이유 중의 하나도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항상 그녀가 생각한 대로 행동했고, 그 행동에 레논이 동참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요코와의 만남 이후 레논의 변화는 비단 음악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표현방식까지 요코의 기질과 개성을 닮아 갔으며, 그 둘의 진정한 관심사는 서로 뿐이었다. 그들이 세계 평화를 위해 벌였다는 갖가지 헤프닝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의도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비난 아니면 광적인 환호였고, 이후 요코의 마음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 와서야 그들은 차분한 호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상이한 정치적인 환경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미국의 히피 문화는 레논을 반전 예술가로 보는 배경이 되었다)
레논은 요코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적 구호로 가득찬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그가 진정한 페미니스트적인 경향을 보였던 것은 1975년 10월 9일 아들 션 오노 레논이 태어난 후 부터였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이 일어나자 요코와 레논은 천국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논은 션과 함께 있을 시간을 갖기 위해 전업주부로 나섰고, 요코는 사업가의 수완을 발휘하며 레논을 대신해 모든 일을 대행하게 되었다. (그녀가 사업에서 레논보다 나은 자질을 보였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레논의 은둔 생활(?)은 션이 5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음악 활동을 재개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80년 12월 8일, 인터뷰 등의 일정을 마치고 요코와 나란히 집으로 가던 중에 레논은 광적인 팬으로 알려진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 의해 저격 당했고 병원을 가는 중에 출혈 과다로 숨졌다.
레논의 죽음은 오노의 반쪽이 죽음을 의미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녀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녀를 살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레논과 요코의 “아름다운 소년(Beautiful Boy)” 션 오노 레논Sean Ono Lennon이었다. 레논의 분신이자 그들 사랑의 결정체인 션이 있었기에 그녀는 용감한 어머니로 살아갈 수 있었다. (사교계의 왕자로 보호 받으며 자란 션의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은가)
그들의 사랑은 세간의 사람들이 볼 때 지나치게 자의식 과잉에다 이기적이고 특별하고 분별력 없는 짓들로 가득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코나 레논은 정상적인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닮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집착이든 질투이든 광적인 열정이든 그들 자신은 Real Love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머물 때 사랑인 것을 알고 놓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용기와 열정과 인내와 노력이 그 둘 사이에 존재했다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Maybe …It’s Real Love!!!
* “잃어버린 주말” : 1973년 10월부터 1974년 11월까지 레논과 요코는 벌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 이전부터 자신이 숭배해 마지않던 요코에게 공공연하게 함부로 대하던 그는 요코의 뉴욕 비서였던 메이 팡과 바람 났는데(^_^), 레논의 주변 친구들은 존이 난폭해지고 엉망이 된 73년무렵부터 요코와의 재회 전까지를 “존의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엉망이었던 레논이나 부당한 대우를 견뎠던 요코나 별거 기간 중에도 서로에 대한 비난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