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80년대가 우리에게 수많은 사회과학 텍스트를 남겼다면, 뚜렷한 정치적 쟁점이 드러나지 않았던 90년대는 문화의 시대로 다가왔다. (80년대와 90년대의 사회적인 상황의 차이점에 대한 것은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하자)
80년대의 논객들 역시 그 시선을 정치판이 아닌 문화의 장으로 돌렸고, 그 중에서도 특히 영화를 둘러싸고 다양하고 폭넓은 논의가 이뤄져 왔다. 90년대의 화두는 바로 문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가 그 사회를 읽어내는 중요한 문화적 기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그 사회의 한 단면을 말해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에 대한 텍스트들이 범람하다시피 한 작금의 상황에서도 대중음악-특히 국내의 대중음악-은 몇몇 이름 있는 평론가들에 의한 반복적인 논의말고는 ‘소비의 대상’으로만 자리해 왔다.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더 소중하다.
이 두 권의 책은 내용과 형식은 비록 틀리지만,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애정과 비판어린 시선을 견지해온 ‘젊은’ 필자들이 (그리고 그 필자들이 외부가 아닌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나름의 관점으로 국내 음악 씬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공통의 의도를 갖고 있다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두 책이 다루고 있는 대상과 그 대상을 읽어내는 방식은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박준흠의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은 장르를 불문하고 국내 대중 음악 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뮤지션들에 대해서 넓게 다루고 있다. 그 중에는 신중현과 같은 이도 있고, 서태지와 같은 매우 주류적이지만 중요한 뮤지션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나 델리스파이스, 아무밴드와 같은 현재 인디 씬이라고 통칭되는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상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진행되는 이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뮤지션과의 ‘인터뷰’이고, 디스코그라피나 연혁 같은 자료들이다. 텍스트로서의 역할 보다는 유용한 자료로서 활용될 공산이 크게 보이는 이 책의 특징은 비록 주관적이라 할 지라도 다양한 뮤지션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데 있다. 마치 ‘국내 주요 뮤지션 총정리’와도 같은 이 책에서 인터뷰 이외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뮤지션들에 대한 박준흠 나름의 ‘성향 설명’이다.
하지만, 만일에 당신이 지금 ‘현재’의 비주류 음악 씬에 대한 깊이 있는 텍스트를 필요로 한다면 얼트 바이러스 출신의 장호연, 이용우, 최지선이 쓴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을 권한다.
박준흠이 쓴 책이 서브에 연재되었던 자료를 재편집, 총정리한 것이고, 방대한 규모에 걸쳐진 것에 비해 얼트 바이러스의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은 ‘락’이라는 한정된 장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느슨하게’ 펑크의 영향을 받아온(말하자면 장르로서의 펑크가 아니라 입장으로서의 펑크를 가리킨다) 이 땅 인디 씬의 태동과 발전, 미래를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풀어내고 있다.
어렵진 않지만, 상당히 분석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이 책의 장점은 가능한 한 과학적이고 체계있는 접근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90년대 들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락 담론’의 실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의 구성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눠진다.
1장 [펑크로 만든 예술, 예술이 뭉갠 펑크]와 2장 [불타는 클럽의 연대기], 3장 [모던 록 제너레이션]이 그것이다.
먼저, 1장에서는 인디 씬의 태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펑크의 세 대표자(?) [삐삐 ‘프로젝트’]와 [황신혜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의 특징과 연결점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의도가 한국 대중 음악계에 먹혔던 배경과 한계점을 짚어내고 있다. 개인적인 취향이 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단락이다.
그리고, 2장 [불타는 클럽의 연대기]는 홍대 문화의 특수성과 함께 ‘홍대 씬’이라고 통칭되는 인디 씬의 태동 배경, 클럽 문화의 현재와 미래를 다뤘다. 그와 동시에 클럽 문화의 발전 과정에서 생성된 인디 레이블의 의미와 현재, 그리고 취약점과 미래까지를 조심스레 예측하고 있다.
3장 [모던 록 제너레이션]은 ‘특별한 모던 록 밴드’ [노이즈 가든] 에서부터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스파이스] 등의 모던 록 밴드들의 음악 성향에 대한 분석, 인디 씬 내에서 그들 음악이 가지는 의미 등을 얘기하고 있고, 그 외에 인디 내의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옐로 키친]이나 [PDS-퓨어 디지털 사일런스] 등의 음악을 얘기하고 있다.
이들이 의도하고 말하고자 하는 논점이 보다 잘 드러나 있는 것은 본문에 해당하는 1, 2, 3장이 아니다. 오히려,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들어가며]와 [나오며]이다.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인디 씬을 읽어내긴 했지만,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은 인디 음악의 전체 씬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비판적 지지(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와 객관적인 분석을 위해 애쓰고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지리멸렬하고 상투적이고 뻔한 말은 하지 않으련다.
이 두 권의 책은 국내 대중 음악, 인디 음악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죽어도 읽기 싫을 수 있는 책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읽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아무리 말려도 읽고야 말 책이기 떄문이다. ……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과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 의 상이한 개성을 비교해 보며 가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란 말도 하나마나 한 소리같아서 하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