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진 6,7월호의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그 글의 의견 대부분에는 어느 정도 동감을 하지만 약간의 모순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점을 느꼈기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조선펑크”란 단어가 더 이상 인디 펑크의 진정성에 대한 변명의 답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조선펑크”는 오히려, ……… 펑크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하는…(중략)……..기성의 지리멸렬한 가치를 시원하게 뒤집을 수 있는 펑크가 바로 “조선펑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블루진 6월호 기사중-
위 글은 물론 지극히도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 생각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몇자 적어본다.
인디 펑크씬에 대한 변명……? 나는 그런 거는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글쓴 이의 말대로 펑크라는 음악이 70년대에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체제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 이는 펑크의 원칙을 들먹이며 상황이 다른 우리나라의 음악에 원칙을 부여하고 있다.
과연 펑크란 정형화 되어버린 문화란 말인가?
만약 글쓴 이의 말대로 삶에 관한 태도이며, 정신이라 하면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음악이 이 시대의 삶이며 태도일 거란 생각은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
노 브레인의 음악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고자 했기에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일텐데, 그런 태도를 전부인냥 받아 들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펑크를 한다고 하는 모든 이들은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삶을 하나의 틀에다 끼워 맞춰야 하는 것인가?
위에 있는 6월호 기사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기성의 지리멸렬한 가치를 시원하게 뒤집는다’고 하였는데… 왜 꼭 그런 식의 반항적인 면만을 고수하는지 난 이해가 안된다.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은 음악을 하는 사람의 일인데….음악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3자가 자신의 입장에만 충실해서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억지가 아닌가?
펑크라는 음악에 저항, 비판이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이미 그들의 음악은 펑크가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만의 독창적인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적인 면으로 따져본다면…. 장르를 핑계삼아…. 그들의 음악은 펑크적인 요소를 갖고있다. 따라서 그들의 음악은 펑크가 아닌 펑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조선펑크”라 칭한 것 같다. 그것은 더 이상 변명이 아닌 태도이다. 그들만의 독창적인 태도인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조선펑크”는 변명이 아닌……..(중략)……그만큼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더 아쉽습니다. -블루진 7월호중-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런 식의 태도들이 그렇게 몇 안되는 클럽들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장악이 아닌 현실이다.
물론 잘못 됐다고 볼 수도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하지만 분명히 글쓴 이는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기에 아쉽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태도의 문제점을 느끼고 비판을 한 건데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안 하나 정도는 밝히심이 어떨까 한다.
그런 대안은 하나 보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서(?) 그들의 태도를 슬픈 태도라고 비꼬았다. ‘언더 문화가 활성화 되지 않은 이 곳’ 에서의 글쓴 이의 태도는 비활성화 된 언더 밴드들을 슬프게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물론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모든걸 해결 하게끔 보고만 있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Rock의 불모지라고 불리우는 이 곳에서 단지 외국의 경우만을 앞세워서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교, 비판 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비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