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도 마찬가지 주의점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엉뚱한 오해를 하지 마시고,
그냥 사심 없이 읽고 즐기세요.
“재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알아보는 J. D. Salinger
Jazz Me Up!
한동안 재즈가 하나의 유행이 되어 재즈라는 단어가 방송에도 거리에도 넘쳐 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즈는 구경도 못한 채 그 단어에만 익숙해졌다. 그 때에는 왜 그리 ‘재즈’가 붙는 이름이 많은지, 립스틱에도, 색조 화장품에도, 책에도 재즈라는 단어를 남발했고, 심지어 한재석 등이 나왔던 ‘째즈’라는 드라마까지 있었다.
(제목은 ‘재즈’가 절대 아니었다. ‘째즈’였다. 물론 재즈와는 일체의 상관성이 없는 소위 ‘수퍼 울트라 서스펜스 스펙타클 에로틱 스릴러’드라마였는데, 내용은 모르겠으나 두 남자 주인공이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등 동성애적 내용을 담고있는 엽기적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기사, 우리나라 드라마의 대부분은 엽기적이다.(백혈병에 걸린 김희선을 보라))
Anyway, 재즈와인 립스틱을 발라보아도, 재즈 카페에서 김현철의 음악을 들어보아도, 드라마 ‘째즈’를 보아도, 심지어 동네 ‘째즈’ 피아노 학원에서(이 경우, Jazz는 ‘좨즈’가 아니라 반드시 ‘째즈’라고 발음 되어야 한다.) ‘째즈’피아노를 배워보아도 재즈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드디어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차라리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술 보다는 짧고 개 보다는 못한 것’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었겠지만, 재즈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었던 나는, ‘째즈 피아노는 jazz피아노와 다르다’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90년 이었던가, 전설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B.B. King이 내한공연을 가졌었다. 그것도 레이 찰스와 함께.
B.B. King? Blues?
나는 수상함을 느꼈다. 당시 나에게 블루스란 곧 ‘땡겨’와 ‘캬바레’였기 때문이다. 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옛 이야기로군.
이름은 또 왜 그리 촌스러운가.
‘B.B. King’이 뭐냐.(벌거(B) 벗은(B) 임금님(king)?) 나 같으면 ‘B.T. King’으로 했을텐데.(특정 밴드를 홍보하는 행위… 용서하시길…)
아, 어찌 되었던 나는 전설의 캬바레 황제가 우리나라에 온다는 줄로만 알았다. 왜냐, 내가 블루스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캬바레는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Metallica의 첫 앨범을 LP로 꺼내어 ‘다 죽여버려(Kill ’em All)’을 들었다.(이런 경우, 반드시 LP이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재즈도 마찬가지이다.
재즈가 boom을 이루었던 그 때는 ‘재즈’하면 곧 ‘차인표’를 떠올렸는데(‘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기억하시는가?), ‘와인잔/스카이라운지/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는 연인/붉은 조명/…’ 을 연상하는 경우가 오히려 좀 나은 경우였다.
블루스와 캬바레를 연결지었던 나의 어린시절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맛이 가는 것은 기껏 차인표 뿐이 모르면서 나대는 사람들이다.
재즈를 즐겨 듣는다기에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김현철과 이소라의 이름부터 듣게 되는 것은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재즈라는 쟝르가 워낙 넓은 범위를 포함하므로, 그들이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 100중 99는 Miles Davis, Charlie Parker, John Coltrane같은 사람들이 달에 착륙한 최초의 인간인지 재즈의 대가인지도 모르기 마련이다.
뭐 Joe Zawinul, Cecil Taylor를 즐겨 듣는다는 식의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재즈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그 단어의 뉘앙스에만 관심이 있다면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재즈 매니아인 것도 아니다. 모두가 매니아일 필요는 없다. 관심이 있으면 열심히 파는 거고, 또 모르면 모르는 대로 솔직하게 살자는 거지. 평생 재즈를 모르고 죽는다고 해서 손해날 일은 별로 없다.
Smack My Bitch Up!
자, 이제는 현재 가요계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는 ‘테크노’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황은 ‘재즈’때와 똑같다.
‘테크노 메탈 핸드폰’, ‘테크노 칼라’ 색조 화장품, 도리도리 춤, 하나같이 테크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에 테크노라는 이름이 붙는다. 모두 테크노가 뭔지 감도 못 잡은 채 그 단어에만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채정안’노래가 (그 ‘울라울라’어쩌구 하는 거..) 테크노라고?
그렇다면 ‘설운도’, ‘현철’은 테크노계의 양대 산맥이다.
사실 생각보다 많은 ‘진짜’테크노 팬들의 반발로, 가요계는 궁여지책으로 ‘테크노 댄스’라는 엽기적인 신조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house dance를 ‘한다던’Noise(팀 이름을 어찌나 잘 지었던지!), alternative rock을 시도’했다던’ 김민종, hip-hop을 ‘한다는’양현석 등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다.
결론
Jazz, Techno, Rock, 아무것도 몰라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가요 관계자 및 ‘다수’ 몰지각한 사람들,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어설프게 나대지 말고 ‘호밀 밭의 파수꾼’을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