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락 음악의 역사는 반세기도 되지 않았다.
해외에서 락 음악의 발달이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문화적인 자양분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국내 락 음악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거의 한줄기 속에서 답습되고, 살해당하고, 되살아나고, 다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다시 작은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나고의 반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락 음악이 우리나라에 태동했던 정확한 년도나, 그것을 주도했던 인물이 누구였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 짚어보는 사건과 사람들이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모습이고, 다양함이 공존하는 (락) 음악 씬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락) 음악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정리이다.
락 음악이 저항의 음악이라는 화두가 과연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인가?
단지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의 단편적인 예일 따름인가?
락 음악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공식이 필요한 것인가?
현재 우리에게 있어 락 음악의 진정성이란 것은 어떤 의미인가?
… 정답은 없다.
답은 락을 하는 사람이건, 락을 듣는 사람이건, 락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사람이건, 그 모두에게 다 다를지도 모른다.
락 음악이 태동했던 1960년대 말의 시기는 사회 정치적인 격동기였다.
그 격동기 속에 존재했던 청년 문화는 흔히 말하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얘기되어진다.
억지로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김민기나 한대수 같은 이들의 포크 음악은 당시 젊은이들의 답답한 처지를 대변해 주는 구실을 하였고, 정치적인 암흑이건, 문화적인 암흑이건 분명히 암울하고 답답한 시기에 작은 빛이 되어 주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김민기나 한대수의 음악은 국내 포크 음악의 뿌리였으며 이후 서유석, 양병집, 4월과 5월 등의 뮤지션들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유신이 극성을 부리던 1975년 박정희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그 흐름이 끊어지게 된다.
(포크 씬의 부활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지는데,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온 조동진을 필두로 동물원, 시인과 촌장, 해바라기 등의 뮤지션들이 포크의 계승자이다)
그렇다면 락 음악이 국내 대중 음악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신중현이 만든 애드 포Add 4가 결성된 1962년? 그들의 데뷔 앨범이 나온 1964년?
어쨌든 국내 락의 생성과 발전을 이야기 할 때, 신중현이라는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는 락이라는 장르를 국내에 처음 들여온 장본인이며, 국내 최초의 락 밴드를 만든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신중현은 트로트와 해외 팝(&락큰롤) 음악만이 존재하던 그 시기에 우리말로 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 락 음악을 시도함으로써 “한국적 락”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신중현이 락이라는 장르를 국내에 시도한 선구자였다면, 락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산울림이다.
산울림은 제 1회 대학가요제 때 ‘샌드페블즈’라는 팀이 불러서 입상한 노래 <나 어떡해>를 만든 김창완 김창훈 등의 형제로 구성되었다. 1977년 나온 산울림의 데뷔 앨범은 트로트의 전성기였던 당시 가요계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산울림은 국내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으면서도 영향을 받은 국내 뮤지션도, 영향을 주고 뒤를 이은 후배 뮤지션도 없는 특이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시대적인 상황에 구애 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현실감 없이 부담스러운 사랑 타령을 하지도 않았다.
일상의 작고 세밀한 부분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과 쉽고도 문학적인 노랬말을 쓰는 능력은, 그들의 개성있는 곡들과 함께 산울림을 국내 대중 음악의 큰 빛으로 자리하게 했다.
암울한 유신 시절은(비록 산울림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많은 대중음악인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빼앗고, -저항의 화두를 끄집어 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온했던’ 시대였다- 대마초 파동 등을 빌미로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 활동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버렸다.
우리나라 언더그라운드 씬은 침묵을 지켰고, 주류 가요시장에서는 오로지 트롯풍의 가요만이 살아 남았다.
싹을 틔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련의 시기를 맞이한 국내 락 씬은 그렇게 사그라드는 듯이 보였다.
80년대는 대중 문화의 이중적인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 시기이다.
소위 말하는 댄스 음악이 시작되었으며,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 매체는 10대를 중심으로 그 문화를 기형적일 만큼 키워나가고 있었고, 국내 대중음악에 염증을 느낀 일반 음악 팬들은 가요를 멀리하고 FM라디오 등을 통해서 나오는 팝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신촌 등지의 라이브 뮤지션들도 있었으나 각종 제약 덕분에 그다지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 채 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었다.
댄스 가수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어디에나 십대 취향의 댄스(비트가 가미된) 음악만이 흘러나왔던 시절이었지만, 양적인 팽창만이 있을 뿐 이렇다고 할 만한 음악적인 발전이나 뚜렷한 성과 없이 댄스 음악 마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러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터지게 된다.
1986년도는 이래저래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해이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나온 해이기도 하고, 시나위의 데뷔 앨범이 나온 해이기도 하고,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던 어떤 날의 데뷔 앨범과 시인과 촌장의 데뷔 앨범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이 한해는 음악(앨범)적인 결실이 매우 다양하고 풍성했던 해라고 할 수 있다.
시나위는 락의 대부 신중현의 둘째 아들인 신대철을 중심으로 해서 결성된 헤비메틀 밴드였다.
그들은 당시 하나의 씬을 형성해 가고 있던 헤비메틀 밴드들의 수장 역할을 했으며, (물론 백두산 등의 다른 밴드도 존재했었다. 어쨌거나) 헤비메틀 음악을 공연장이 아닌 레코딩된 물질로 담아냈던 최초의 밴드였다. 헤비메틀 씬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수많은 밴드들과 수많은 뮤지션을 양산해 냈다.
(시나위의 예만 하더라도 임재범, 김종서, 손성훈을 비롯해서 강기영, 김영진, 서태지, 정한종, 김민기 등의 뮤지션을 배출했다)
그리고 들국화의 경우 침체되어 있던 국내 대중 음악 씬에 확실히 신선한 물꼬를 튼 이들로, 가요의 친근한 구성으로 국내 젊은이들의 감성에 어필하는 주체적인 락의 방법을 모색하여 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들국화는 공연장에서 뿐만 아니라 공중파 매체에서도 스타의 자리를 차지한 특이한 예를 보여주었고, 그들이 해체하는 1989년까지 그 ‘행진’은 계속된다.
‘시인과 촌장’과 ‘어떤 날’은 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장르가 부재했던 그 당시 대중 음악계에 새로운 포크풍의 음악을 들고 온 이들이었다.
섬세한 감성으로 노래하는 이들 음악의 주제는 하지만, 통속적이거나 구태의연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현실적인 바탕 속에 동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노랫말로 ‘음유시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시인과 촌장과 어떤 날의 감성은 이후 이들이 해체되고 난 후에도 하덕규, 조동익, 이병우 등의 이름으로 계속되게 된다)
헤비메틀의 춘추전국 시대라고 할 만한 시기가 지나고 나서 온 것은 발라드 전성 시대였다.
신승훈과 변진섭으로 대표되는 발라드 가수들은 청소년(특히 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허상과도 같고 무의미하고 진부한 사랑/이별을 주제로 하는 노랫말, 구태의연하고 짜깁기, 표절 의혹이 있는 곡들로 국내 대중음악의 발전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대 초반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를 중심으로 댄스팀에 있던 양현석과 이주노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어른들을 뜨악하게 만들 만큼 어처구니 없고 노래같지 않은(당시 그런 노래가 없었으므로) 노래로 출현했다.
댄스 음악의 외피를 입고 나온 이들의 음악은, 그러나 다양한 음악적 토양을 기초로 해서 나온 것이었으며, 이미 확보된 굳건한 팬층을 뒤로 하고 해를 거듭 할수록 락적인 색채를 더해가 락 음악(혹은 락의 요소가 많이 들어간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는 기이한 현상을 불러왔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떠돌고 있던 신세대 담론과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연과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인기 등과 맞물리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젊은 세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가요계의 판도가 이들로 인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은퇴선언을 했지만, 이후 출현한 아이돌 스타(젝키나 HOT를 위시하여)들의 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을 받은, 복제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감이 있지만 듀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현도와 김성재로 구성된 듀스 역시 댄스 음악이나 하는 애들로 오인되었지만, 이들이 보여준 것은 훵키한 리듬에 맞춘 그 누구도 제대로 시도해 본적인 없는 흑인 음악의 주체적인 수용이었다.
서태지의 은퇴 이후 주류에서나 언더그라운드에서나 스타 부재의 시기가 도래한다.
1990년대 후반은 언더에서는 ‘인디락’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밴드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 헤비메틀 씬에서 내노라하는 실력을 자랑하던 강기영과 박현준이 이윤정이라는 어린(?) 여자애를 영입해 만든 삐삐밴드의 출현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들의 출현은 삐삐밴드 데뷔 앨범의 타이틀대로 “문화혁명”이라고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오버와 언더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했던 시기에 그 경계를 허물면서 키치적인 유치함으로 무장하고 나타났던 이들이 추구한 것은 오버에 존재하는 스타 시스템이나 음악 그 자체를 무시한 비즈니스적인 측면과 언더에 존재했던 테크닉 제일주의와 폐쇄적인 회로 그 모두를 비웃는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 이후 출현하는 황신혜 밴드 등을 들 수 있다.
김건모나 신승훈 등의 주류 가수들이 앨범을 낼 때마다 새로운 신종 장르의 이름을 걸고 나오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무늬만’ 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주류 가요 시장은 이제 새로운 ‘스타’ 만들기 작전에 돌입한다.
HOT와 젝스키스의 등장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조금 지나면 SES와 핑클 등이 출현하지만…)
국내 음악 씬에 존재하는 수많은 뮤지션들, 특히나 어떤 식으로든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활동한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송골매나 작은 거인, 조용필, 김현식, 신촌블루스, 한영애, 부활, H2O, 넥스트, 패닉… 굵직굵직한 뮤지션들 중에서 빼먹은 이름들만도 엄청나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사건이나 씬의 출발을 일으킨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이 글이 국내 대중 음악사의 객관적인 서술은 아닐 것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이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리울 정도로 수많은 인디락 밴드들이 존재하고 있고, 주류에서는 음악성 운운하지만 여전히 대중매체의 인형으로 존재하는 립싱크용 댄서들이 가수랍시고 버젓히 버티고 있다.
오버와 언더의 정체성은 그대로 둔 채 경계를 허물만한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국내 대중음악의 역사가 지금부터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일 따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