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빌보드를 비롯한 각종 차트를 주목해보라.
하나의 어떤 두드러진 경향이 보이지 않는가?
당신이 락을 비롯해 거의 모든 장르의 대중 음악에서 살랑살랑 거리는 달콤함과 댄스 비트, 친근한 구성을 발견했다는 대답을 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제는 락 사운드가 주는 존재의 형언할 수 없는 무거움에서 벗어나고 싶고, 신스 팝과 그 시절의 아이돌이 그립다는 말을 하더라도 골수 락 매니아들의 비난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말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90년대 폭발했다가 사그러든 얼터너티브를 중심으로 한 락의 시대에 황혼이 깃드는 지금, “팝”을 주인공으로 하는 또 하나의 시대가 서서히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락 팬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 1980년대는 말 그대로 팝의 시대였다.
1983년 공식적인 출범을 한 MTV의 성공과 함께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즐기는 것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듣는 것”만을 중시했던 많은 락 뮤지션이 보기 좋게 탈바꿈 되거나 소멸해 갔다. 마돈나Madonna나 마이클 잭슨Micheal Jackson은 물론이고, 많은 팝 스타들이 화려한 모습과 춤,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 때까지 라이브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음악계의 판도는 시각적 이미지의 승리로 반전되었고, 이제 락은 죽었다…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운드 중심”의 락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음악을 하는데 용모가 필수적인 사항으로 선택되어졌고, 소녀 팬들을 사로잡을 만한 미모와 시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현란한 댄스 혹은 비디오 클립이 음악을 하는데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실험적인 사운드 보다는 보컬이 중심이 되는 친숙하고 달콤한 멜로디가 주를 이루었으며, 뮤직 비디오 역시 하나의 대중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아 갔다…
그렇게 80년대는 팝을 위한, 팝에 의한, 팝의 시대였다.
반면, 팝의 번쩍 거리는 세계와 스타들이 들끓는 그 때, 공룡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던 락은, 좀 더 다른 모습으로 대학가나 언더그라운드에서 재탄생하고 있었다. 락을 죽였던 MTV가 “얼터너티브 락”이라고 통칭되던 이들을 주목하게 된 것은 이들이 가지는 잠재적인 상업적인 가치 때문이었다.
락을 매장시켰던 곳에서 다시 부활한 락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90년대는 다시 락의 전성기가 된다.
보다 개인주의 성향, slacker세대를 대변하는, 혹은 내면의 목소리에 중심이 실리는 등… 90년대 락의 특성은 보다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졌고, 그 사운드 또한 전형을 탈피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장르의 유행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일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락의 확산과 재생산은 어느 순간 부터인가 답습되기 시작하고, 락 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주의 깊은 사람들은 90년대 말부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하나의 현상 혹은 바람을 목격했을 것이다.
다름아닌, 팝 음악의 재림…
U2를 비롯해서 락 음악의 정신을 지켜왔던 뮤지션들이 팝 적인 앨범을 낸 것을 비롯해서 메가데스Megadeath의 최신작, 콘Korn이나 림프 비스킷Limp Bizkit 같이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던 하드 코어 밴드들에게까지 말랑말랑하고 친숙한 팝 멜로디가 스며들었다.
“친근하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팝”은 더 이상 비아냥거리는 말로 쓰이지 않게 되었고, 각종 음악 차트에서도 보다 팝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뮤지션들의 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팝의 시대가 돌아와서 기쁘다”란 말까지 나왔을까)
그것 뿐만이 아니다. 팝의 시대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의 유령(혹은 향수)까지 불러냈다. 마돈나Madonna나 조지 마이클George Micheal을 비롯한 “팝 스타”들의 음악이 다시 많은 (락)음악 애호가들에 의해서 부활되고 있으며, 때를 같이해 디페쉬 모드Depeche Mode나 펫 숍 보이스Pet Shop Boys 등 신스팝Synth-Pop이라고 불렸던 뮤지션들의 음악이 재론되고 있다.
예전에 “아이돌 스타” 정도로 치부되었던 듀란듀란Duran Duran이나 아하A-Ha 등의 음악 역시 다시 읽혀지고 재평가되고 있다. 먼지뒤집어 쓰고 있던 책상 서랍 구석에서 다시 꺼내져 애지중지되는 이들 음악의 공통점은 과거의 것이라는 것 말고도 “듣기 좋음”에 있었다.
듣기 좋은 멜로디나 선율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종래의 음악 매니아들이 지금 와서 듣기 좋은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답습되고 정해진 틀에 맞춰진 음악에 대해 신랄했던 이들이, 조금은 뻔해 보이는 공식을 가진 음악을 듣고 감정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을 단순히 시대의 흐름으로 봐야 할까? 한 세기를 마감하고 다른 세기를 맞이하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현상이 주는 의미를 읽어야 할까?
답습된 형식이라는 의미, 강제성과 규율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락”은 분명히 팝에 반反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을 때, 팝과 락의 관계는 딱 자르거나 대립항으로 매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팝 음악이 흔한 통념처럼 아무 생각이 없고, 단순하고, 퇴폐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따위는 무시한 저급한 음악일 따름이라는 견해 속에는 “음악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경고가 담겨있었다.
지금까지의 락이 동시대 젊은이들의 사상과 가치를 대변해 온 것은 사실이다.
기성 사회의 질서를 거스르고 진보적인 입장을 자연스럽게 -물론 그렇지 않은 락 뮤지션도 많이 있었지만, 그 상징성으로 봤을 때, 락은 “저항”이라는 화두를 늘 지녀왔다. 그것이 사회적인 저항이든 개인적인 저항이든- 표방해 온 점은 락 음악의 건강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반면 팝의 경우 MTV와 아이돌 스타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비즈니스로서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잊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다. 이는 팝을 위한 변명을 하는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화려한 쇼 비즈니스 이면의 추악한 진실이다.
지금 도래하고 있는 팝의 시대는… 쇼비지니스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소비를 교묘하게 유도하는 생산이라기 보다는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서 생산되고 먼지 낀 창고에서 다시 찾아지는 “애지중지 하는 어떤 것”을 위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산업화의 과정이 이미 지나고, 첨단 기계문명 시대라고 할 만한 현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추악한 인간 문명의 진실을 금속음에 실어 전달하는 음악이 아니라 -그것이 비록 잔인한 진실이라 할 지라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정이 실린 음악일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팝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간이 음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팝 음악은 이끌어 냈고, 듣기 좋고 마음 편안하고 쉽고 친근한 팝 음악에 대중들이 몰리는 것은 어쩌면 잊고 있었던 어떤 것으로의 회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