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난 진심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당신이 나와 함께 견뎌 준다면, 난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맹세했었다. If you live through this with me I swear that I will die for you (<Asking For It>, [Live Through This]).
하지만 내게 돌아온 건 “남편을 잡아먹은 기가 센 여자”라는 잔인한 말이거나, 돈에 눈이 멀어 타블로이드판 신문에나 실릴 거짓말을 카메라에 대고 늘어놓는 혈육의 모함 뿐이었다. (세상에, 그가 나의 아버지라니!)
그리고 거머리 처럼 달라붙는 가쉽 기자들, 진실을 안다고 떠들어대는 수많은 적들…
긴 시간이었다. 그가 내 곁을 떠난 지 6년 째가 되었다.
그동안 그와 나의 분신 프랜시스는 작은 숙녀로 자랐고, 나는, 빌어먹을, ‘내가 없으면 더 행복할 커트니와 프랜시스’라는 그의 유서처럼 순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기자들과 전세계 팬들 혹은 적들의 눈길이 나를 떠난 적은 없었지만, 그 시선이 적의에 찬 것일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처럼 나는 고개를 쳐들고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마치, 어린시절 히피 부모 밑에서 자란 내게, 그래서 프릴 달린 원피스 대신 ‘전위적인'(이 말이 주는 뉘앙스처럼 그다지 멋지진 못했지만) 옷차림을 하고 다녀야 했던 내게 아이들이 “오줌싸개(pee-girl)”라며 놀렸을 때조차 울지 않았던 것처럼.
커트와 나는 닮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천국에 갈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지옥을 겪어야 했다.
그는 나의 사랑, 나의 아이였고, 나는 그의 연인, 친구, 엄마, 동반자, 그를 지탱해주는 보호자여야만 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불행이었을까.
정말 내가 그의 어두운 면을 더 부추겼을까.
그가 우울한 사람이었던 것을 안다. 그는 결코 삶의 밝은 면을 기꺼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견디기엔, 명성을 견디기엔, 추악한 쇼비지니스의 현실 속에서 뒹굴기엔, 그는 지나치게 섬약하고 예민했다. 그의 순수한 정신이 그 모든 것을 견디지 못했다.
드럭은 일시적인 위안 이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공은 그를 더욱 나빠지게 했다.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어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쯤은 안다.
커트의 죽음을 팔아서 부와 명성을 쌓고, 그의 죽음에는 아랑곳 없이 암내를 풍기고 돌아다니는 암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도 안다. 빌리와의 과거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커트가 죽은 후에 내게 조신한 미망인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나, 커트니 러브에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그는 죽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내가 느껴야 했던 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그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방법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외면한 것이다.
지금은 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여신이라고 불렀던 나조차도 그의 중심에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도, 나도, 그를 어두운 내면에서 끄집어낼 수 없었던 것 뿐이다… 그 뿐.
어제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커트의 꿈을 꿨다.
프랜시스와 나와 그는 … 햇살이 내리쬐는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농담까지 했다.
“이봐, 사람들은 내가 고독에 허덕이다 죽은 줄 알더군, 난 영웅과는 거리가 먼 병신 자식일 뿐인데 말이지.”
그, 커트 코베인 Kurt Donald Cobain, 1967년 2월 20일, 물고기 자리의 섬세함을 가지고 그가 태어났다.
내가 히피의 자식이었던 것처럼 그 역시 반듯한 부모와 가정을 가지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자동차 수리공이었으며, 어머니는 독일계 여성이었다. 유년기까지는 행복했던 그의 삶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은 부모의 이혼 이후부터였다.
“… 부모가 이혼했을 때, 갑자기 모든 세상이 뒤바뀌었다. 반사회적으로 돼가며 주변에 존재하는 사실들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회적인 것과 음악 듣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by Kurt)
늘 주변부를 맴돌아야 했던 그의 학창 시절은 히피 부모 아래서 친구를 가질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던 나의 소녀시절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것이 없는 삶이었다.
나, 커트니 러브 Coutney Love.
1965년 7월 9일생, 게자리.
그보다 이 년 더 세상을 일찍 보다.
임상치료가인 린다 캐롤 Linda Carroll과 Grateful Dead의 전기작가이자 출판업자인 Hank Harrison 사이에서 태어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서 오레곤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다소 거칠고 반항심 가득한 아이였고, 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남긴 유산을 받았을 때, 세상을 둘러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고 생각했던 나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마침내 여행에서 돌아온 내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가수” 였고, 그러기 위해서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노래를 불렀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Faith No More”의 초창기 때 보컬을 맡았던 것이 바로 나였다.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던 나는 알렉스 콕스 감독의 “시드와 낸시”에서 낸시의 친구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서 출연한 것이 또다른 펑크락 영화 [Straight to Hell](1987)이었다.
유산이 동이 나자 돈이 필요했던 내가 시도했던 일은 스트립 댄서였다. 하지만, 뚱뚱하다는 이유로 클럽 주인에게 퇴짜를 맡았고, 외로운 남자들이 많은 알래스카로 떠나기도 했다.
LA로 돌아와서 그룹 홀 Hole을 결성한 것이 1989년의 일.
데뷔 앨범을 낼 즈음에 커트를 만났다.
당시 나는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와 연인 사이이기도 했는데, 독선적이고 차갑게 느껴지는 빌리에 비해 천진할 정도로 섬세한 커트에게 묘한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알다시피… 짧은 만남 이후에 헤어져 있다가 다시 재회했고, 프랜시스를 임신했다.
우리는 1992년 결혼을 했다.
그즈음은 커트와 그의 밴드 너바나가 한창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때였으므로 덩달아 나도 “커트의 아내”로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 솔직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의 명성에 기대어 홀의 음악까지 덤으로 명성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내가 임신 중에 헤로인을 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고 심한 욕을 들어야 했던 것처럼, 약물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내게 한없이 기대기만 했던, 그래서 나의 음악이나 나의 삶보다는 그의 신상을 염려하고 보살피는 것으로 내 삶을 소모시켰던 이기적인 그 역시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할 생각도, 그를 미워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부모인 우리가 약물중독자란 이유로 사회 단체에서 프랜시스를 빼앗아 가려고 했을 때, 우리는 처절한 싸움을 했고, 이겼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와의 생활에서 점점 망가져 가는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 이혼을 준비하던 1994년… 그가 죽었다.
빌어먹을, 가슴 아픈 유서 한 장 남기고 프랜시스와 나를 남기고 죽었다.
성공이 어떤 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그림자로 적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를 지켜보며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주변인이었고, 어쩔 수 없이 마이너리티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위선 떠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하지 못할.
그와의 결혼 생활 2년만의 일이었다.
안다.
이런 식의 궁상은 커트니 러브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삶을 살아가야 할 프랜시스의 엄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모성이 전부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커트가 버리고 간 삶을 즐겨야 한다. 그것은 의무도 책임도 권리도 아닌 그저 당연한 진실이다. 거기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이년 간의 결혼 생활에서 그가 남긴 것이 절망만은 아니다. 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더 고통스러웠을까, 덜 고통스러웠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단지 루저loser의 표본같은 섬약한 정서를 가진 음악인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어떤 종류의 천재성을 가진.
… 그가 얼마나 다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가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메인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나, 커트니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하든지 당당하게 고개들고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할 것이며, 사람들의 손가락질 따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나머지 삶을 그림자로 채우고 싶진 않다.
실망스러운가?
철저히 이기적이면서 철저히 서로에게 속해있었던 것이 우리들의 사랑이었다.
… 그가 마음 춥지 않은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