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전개되는 편집, 때로는 현란한 때로는 어두침침한 색깔로 사람들의 망막을 자극하는 화면들, 핸드헬드 카메라 기법 (손에 카메라를 들고 배우들과 함께 움직이며 찍는 기법) 에 의해 만들어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장면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Happy Together”, 대니 보일 Danny Boyle감독의 “트레인 스포팅 Trainspotting”,
“쉘로우 그레이브 Shallow Grave”를 비롯하여 최근 개봉된 “케미컬 제너레이션 Chemical Generation”, “롤라 런 Lola Rennt”에 이르기까지 CF에 길들여진 신세대들의 오감을 점령한 수많은 영화들은 이러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영화의 촬영, 편집기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면서, 사운드트랙도 전과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대체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혹은 연주곡들로 이루어져 영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거나, 뒤에서 받쳐주는 소품의 역할을 했었다. 이는 역대 오스카상 영화음악상 수상작들이 대부분 John Barry가 담당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 “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 혹은 John Williams의 “스타워즈 Star Wars”, “죠스 Jaws” 그리고 Vangelis의 “불의 전차 Chariots of Fire” 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더욱 새롭고 자극적인 영상을 원하는 영화 팬들의 요구와 맞물려 강렬하고 화려해졌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 영화의 사운드 트랙들이 하드코어나 애시드한 영국 스타일의 곡들로 중무장을 하고는 레코드 가게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중 영화 못지 않게 영화같은 곡들로 많은 사랑을 받은 다양한 사운드 트랙들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 선두주자 격으로 1992년 시애틀에서 음악을 하는 한 뮤지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싱글스 Singles”가 있다.
이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사운드트랙에 대거 참여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영화에 실제로 출연하는 Pearl Jam (주인공인 맷 딜런 Matt Dylan의 밴드멤버들로 나왔었음)을 비롯하여 Sound Garden, Alice In Chains 등의 노래뿐 아니라 Jimi Hendrix의 곡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발라드음악까지 실린”Singles” 의 사운드트랙은 그리 재미없는 영화라는 세간의 평과는 관계없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그런가 하면 모 음료수의 광고에 영화의 첫 장면과 함께 인트로가 소개되면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던 “트레인 스포팅 Trainspotting”의 경우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슬램가 청년들의 어두운 삶을 다룬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마약중독자인 그들만큼이나 끈적하고 어두운 음질들로 가득 차있다. Underworld의 “Born Slippy”로 대표되는 14곡의 영화음악들은 우울하지만 아름답다. (제발 광고에 나오는 신나는 드럼 비트는 잊어주기를…) 이러한 곡들은 영화와 완벽하게 어울릴 뿐 아니라, 그 사운드트랙 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지난 달 개봉된 “매트릭스 Matrix”는 인간의 뇌세포에 인위적인 신호를 보냄으로서 인간이 현실에서와 똑같이 가상현실에서 느낀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S.F.적인 줄거리 그리고 화려한 특수효과에 딱 어울리는 RATM(Rage Against the Machine), 마릴린 맨슨 Marylin Manson, 프로디지 Prodigy등 유명한 테크노, 하드코어 밴드들의 음악이 영화의 곳곳에 적절히 사용되었다. 그만큼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영화팬들 뿐 아니라, 음악팬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케미컬 제너레이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할 수 있다. 이미 영국 문화권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어빈 웰시 Irvine Welsh (“트레인스포팅”의 작가)의 3부작을 영화화한 “케미컬 제너레이션”이 어떤 내용이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트레인스포팅”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의 이름이 보이기도 하는 이 사운드트랙은 ‘드럭 컬처와 연결성을 갖는 친-일렉트로니카 진영의 도원결의’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다소 평이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영화와 무관한 옴니버스 앨범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곡들은 싱글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반면 21살의 젊은 나이에 데뷔해 독일영화의 기대주로 떠오른 톰 티크베르 Tom Tykwer의 “롤라 런”의 사운드트랙은 지금까지 소개된 것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보스의 돈을 지하철에 두고 내린 남자친구의 목숨을 위해 아버지에게 뛰어가는 롤라의 모습을 두 에피소드에 상반된 결론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일단 감독 자신이 작곡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수록곡들을 모두 프로그래밍에 의존한 테크노 곡들로서 영화의 배경음으로 사용했다. 이는 여러 뮤지션들의 컴필레이션 앨범형식을 띄고 있는 요즘 사운드트랙의 추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롤라가 열심히 뛰어다니는 장면에 나오는 연작은 “롤라 런”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되는 곡들이 제작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 어느 방법으로든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영화음악이 단지 배경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세대를 대표하는 음악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는 멀티미디어로서의 영화의 모습이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