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갔다.
한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문명의 발달은 날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예전 같으면 100년의 시간이 걸렸을 일이 10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이뤄지기도 하고, 1년이 멀다 하고 과학기술과 그에 따른 개개인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을 이루는 기본 요건은 의식주가 분명하지만, 막말로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
현대 사회는 문화가 필수적인 삶의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음악의 역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더 인간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모든 것은 연관된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인과성이 있고 또한 본질이 있다.
우리가 즐겨 듣는 락 음악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뿅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천재라서 등장하자 마자 성공했던 것도 아니고, 비틀즈의 음악이 단순히 그들의 창조성만으로 대 히트를 친 것만도 아니라는 거다.
서론이 너무 길면 재미가 없으니 각설하고, 20세기를 보내면서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을 만나러 떠나보자. 일명, “20세기 대중 음악의 사건과 사람들”…
1. [‘락Rock’이라고?] 2. [1950년대 – 락큰롤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 3.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과 락큰롤] 4. [모드Mod 문화, 그리고… 브리티쉬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5. [60년대 미국의 사회운동과 포크락]
락이란 단어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쓰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구르는 돌덩이 같은 사운드라고 해서 ‘락큰롤Rock N’ Roll’아리는 말이 쓰였다더라… 흑인들의 퇴폐적인 춤동작에서 나온 말이라더라….근데 이것도 확실치는 않다더라…정도의 풍월만 떠돌 뿐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단어의 의미를 굳혀온 락의 역사이고, 이 역사는 사회적인 사건들과 함께 움직여 왔다.
음악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향가니 속요니 그런 것들이 고려시대 조선시대 구분 없이 존재 해왔고,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뭔가를 끊임없이 사고하고 생산해내려는 특성에서 기인할 런지도 모른다. 혹은 유희의 인간이라는 특성 때문인지도.
어쨌거나 유사 이래 노동요가 있었고, 한가하게 노닐 때 즐기던 음악이 있었고, 장사를 지낼 때 쓰이던 음악이 있었고, 기쁠 때 부르는 음악, 슬플 때 부르는 음악이 있었다. 궁정의 음악이 있는가 하면, 서민들의 음악이 있었고, 적어도 눈에 보이는 봉건적인 신분관계가 사라진 근 현대 사회에서 ‘취향’이라는 애매한 조건 아래서 취사 선택해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음악이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락(음악)이란 뭔가.
락은 (적어도 생성단계에서만은) 기성의 질서를 거부하는 젊음이었고, 기성의 가치를 부인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 이었다. 그때까지 음악의 모든 금기와 암묵적인 공식을 락은 뒤집었다.
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인종 분리 정책 등이 락의 탄생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혹은 락이 사회 운동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락의 “태생부터 불온한” 특성을 이해할 것이다.
락의 이전 형태인 락큰롤의 탄생이 언제라고 단정 짓기란 힘들다.
락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부터 흑인 사회에는 이름 붙이지만 않았지 락큰롤의 모습을 띤 음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초기 탄생한 락의 스타라고 한다면 누가 뭐래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꼽을 수 밖에 없다.
락이라는 음악이 흑인문화에 큰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락큰롤이라는 장르가 안정적인 기의譏議를 가지게 되었고, 대중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락큰롤이라는 형태가 갖춰진 것이 엘비스 프레슬리 때라는 것이다. (물론, 흑인들의 가스펠과 소울, 블루스 등의 요소가 뒤섞인 록큰롤은 이후 백인의 컨트리 음악까지 흡수하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의 목소리와 백인의 감성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뮤지션이다. 트럭 운전사 출신의 그가 출현한 1954년부터 락큰롤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후 엘비스를 추종하는 수많은 열성 팬들과 또다른 락큰롤 무지션들이 속속 출몰하게 된다. 제리 리 루이스나 리틀 리처드, 칼 퍼킨스나 빌 헤일리 같은 백인이면서 흑인의 감성을 가진 뮤지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비트 세대의 시대가 오게 된다.
비트문화라고 불리웠던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는 기성의 도덕이나 질서, 정신을 부정하고 탈피하고자 했다. 비트 세대는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고 세상을 냉소하며 삶에 대해 별반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당대의 권태로운 일상을 거부한 것이 바로 비트족이었다. 비트 세대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것은 존 케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우즈 등의 문학인들이었다.
그러면 락큰롤에서 비트족들의 정신은 어떤 식으로 구현되었을까?
사회의 금기를 깬다는의미에서 비트 문화와 락큰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락큰롤은 모든 금기, 그 중에서도 섹스에 대한 금기를 무참하게 깨 나갔다. 락큰롤의 가사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야한 몸동작은 성적인 은유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락큰롤의 대담성은 비트 문학이 기성의 가치를 조롱하기 위해 초현실적인 문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무참하게 까발려 놓은 것과 유사하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락큰롤이 영국으로 건너가 인기를 누리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국 노동계급의 반체제적인 특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비틀즈도 그랬고… 근래의 오아시스 같은 브릿팝 밴드의 자긍심 역시 노동계급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니던가).
어쨌거나 미국에서 건너간 락큰롤은 영국에서 또다른 붐을 일으키며 클리프 리처드같은 거물을 탄생시켰고, 미국의 락큰롤이 중산층의 문화였던 것에 반해 노동계급의 문화로 자리잡아 갔다.
그리고 ‘모드’족의 출현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락큰롤이 인기를 얻었던 무렵, 가죽 재킷을 입고 구렛나룻을 기르고 폼나는 모터 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고유의 집단 문화를 키워 나갔던 락커 집단과, 그 반대 편에 있는 모드 집단이 있었다.
‘모드’는 지나칠 만큼 말쑥한 옷차림, 얌전해 보이는 프랑스 풍 더벅 머리와 소울 뮤직, 모터사이클이 아닌 예쁘장한 스쿠터를 타고 다녔던 모드족들의 문화인 동시에 당시 영국의 최첨단 패션, 스타일, 문화에 대한 개념이다.
베이비 붐 세대를 대변하는 모드 문화는 경제적인 풍족함을 배경으로 냉정하고 ‘쿨’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그들은 불법적인 약물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최첨단의 유행을 쫓기도 했지만,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가는 부류이기도 했다.
짐작하겠지만, 모드족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초기 비틀즈이다.
비틀즈는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경쾌하고 단순한 특유의 팝적인 멜로디로 그야말로 신화를 창조했고, 락큰롤의 본고장 미국으로 역수출되어 브리티쉬 인베이젼(영국 침공)이라고 불리우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음악 뿐만 아니라 패션과 외모의 유행을 퍼뜨린 스타가 되었으며,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전세계적인 이슈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되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 비틀즈의 이름은 더 이상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 명사에 가까운 단어가 되었으며, 존 레논의 말처럼 그들은 예수보다 더 유명한 이름에 가까워 졌는지도 모른다.
팝에서나 락에서나 비틀즈라는 이름은 모든 장르에 걸쳐 모든 시도를 다하고, 실험과 혁신을 끊임없이 했던 선구자로 통하게 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비틀즈의 신화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영국의 또다른 락큰롤 스타인 롤링 스톤즈 역시 20세기 사건과 사람들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팝적인 경쾌함으로 살랑거리면서 때로는 무정부주의적이고 때로는 몽상가적이고 때로는 사회주의자적인 면모를 드러냈던 비틀즈에 비해 롤링 스톤즈는 거칠고 원시적인 외양과 원색적인 노랫말로 리듬 앤 블루스를 차용한 락큰롤을 선보였다.
키스 리처즈와 믹 재거, 브라이언 존스 등의 걸출한 뮤지션들로 구성된 이들의 성공은 영국에서 리듬 앤 블루스의 붐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반향을 얻었다.
두 번의 “영국 침공”을 거치면서 미국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비트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기성의 가치에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전하기 보다는 일정한 집단 내에서 공유된, 삶을 바라보는 또다른 방식에 그쳤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음악이 미국으로 들어 오고, 시대가 맞아 떨어지면서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제도적인 불합리성, 베트남전 문제 등) 락큰롤은 저항이라는 화두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를 따른다는 미국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명분 없는 살인이나 다름없는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갔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비도덕적이고 불합리한 면을 비판했다. 진보적인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인종차별과 성차별, 국가적인 권력 남용, 약소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대한 이러한 반발은 거대한 흐름으로 미국 사회의 변화를 몰고 왔다.
이 때 락의 저항성은 구체적인 정치성을 띠게 된다.
그 중에서도 서사성이 강한 “포크락”은 노래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70년대의 청년문화에 통키타와 김민기 한대수 등의 포크 음악이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 봐도 포크 락의 사회 참여는 낯설지 않다)
이 때, 대학가에서부터 인기를 얻었던 포크 락 가수들은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폴 앤 메리 등의 뮤지션이었고, 이들의 모습을 정치 집회장에서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밥 딜런은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움만을 쫓는 순수 포크를 지양했을 뿐더러, 선전선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이기만 한 음악도 거부했다. 그는 사회적인 은유를 노래에 담아내는 계관 시인이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노래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뛰어난 문학성을 담고 있는데, 그의 음악에 담긴 이러한 문학성은 첨예한 문제가 존재했던 시대가 낳은 역작인 동시에 밥 딜런이라는 개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6. [서프Surf 사운드…] 7. [히피Hippie 문화와 싸이키델릭 락Psychedelic Rock] 8. [히피 세대의 3J]
한편, 1966년 비틀즈가 승승장구 하고 있을 무렵…
미국에서도 비틀즈와 유사한 의미를 띠는 스타가 탄생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비치 보이스”이다.
“서프 사운드”라고 훗날 이름 지어 지는 이들의 사운드는 아무 걱정 없이 즐거운 상태를 표현했으며, 이는 무거운 사회 분위기에서 여유를 찾고 있었던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들의 성공 이후 “캘리포니아 드리밍”으로 유명한 마마스 앤 파파스가 출현했고, 터틀스, 리브스 등의 서프 사운드 밴드들이 나오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 바람이 불고 있을 무렵…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수상 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싸이키델릭”과 “히피”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바로 반전 운동 과정에서 출현한 히피 문화와 히피 세대의 출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히피족”은 “비트족”의 영향으로 출현한, 말하자면 비트족의 후손 쯤 되는 이들이었다.
비트족의 후예라고는 하지만, 기성의 가치와 질서를 부인한다는 것 말고는 비트족과 또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 바로 히피족들이었다.
이들의 공통 가치는 사랑과 평화, 반전 등이었고, 자신들이 내건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히피 공동체에서는 남녀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생활했고, 약물을 통해 얻어지는 환상을 즐겼다. (약물의 적극적인 이용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자유분방한 성관계 역시 히피 문화를 구성하는 부분 중의 하나였다)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락 뮤지션이라고 하면 “그레이트풀 데드”의 제리 가르시아,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음악은 각각의 개성이 다르지만 약물이 주는 환상의 세계에 대한 언급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레이트풀 데드나 제퍼슨 에어플라인의 경우, 앨범 재킷에서부터 싸이키델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시적인 가사를 통해 약물과 사랑과 사회 참여, 반전 등을 노래했다.
히피의 본산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했던 그레이트풀 데드나 제퍼슨 에어플라인의 경우와는 달리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 남았던 히피 문화와 락큰롤의 반영웅Anti-Hero “도어즈”의 짐 모리슨의 경우 또다른 신화를 창조했다.
‘도마뱀의 왕’으로 불리웠던 짐 모리슨은 광기와 자기 파괴적인 성향, 양심적이고 도발적인 다중적인 면모를 드러낸, 말 그대로 락 스타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도어즈는 음악 실력 면에서도 매우 뛰어났다. 짐 모리슨은 시인이었고 카리스마 번뜩이는 락큰롤 스타였으며, 결국 약물 과용으로 죽어서 신화로 남은 히피 세대의 아이콘이었다.
짐 모리슨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이 더 있다. 우연히도 세 사람의 첫 이니셜은 J로 시작되어(Jim Morrison, Jimi Hendrix, Janis Joplin)3J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서 더욱 더 유명해졌다.
재니스 조플린의 경우, 스물 세살부터 스타의 자리에 올라서 외로움과 고독과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이기지 못해 약물과용으로 죽은 경우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적인 락 계에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나무였으며, 이후 여성 락 뮤지션들의 동경과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걸쭉한 감성이 담겨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사후에도 여전한 사랑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기타라는 악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사람이 나머지 ‘제이’인 지미 헨드릭스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의 신이라고 불리울 만큼 천재적인 연주를 보였으며 기타 연주 기법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그 역시 약물에 의해 죽었다.
9.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10. [우드스탁Woodstock] 11. [간과될 수 없는 흐름 – 글램락Glam Rock] 12. [죽어서 신화로 남다]
잠깐동안이지만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윤현 감독의 영화 “접속”에서 흘러나왔던 <Pale Blue Eyes>라는 곡으로 뒤늦게 그 이름을 떨쳤던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바로 그들이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2년이라는 시간동안 활동을 하다 해산해 버린 그들이지만, 지금까지도 대단한 평가를 받는 음악을 만들었다.
벨벳언더그라운드는 비트 문학에 심취했던 루 리드나 존 케일 등의 멤버와 팝아트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이 만나 이뤄낸, 경계가 불분명한 애매모호한 ‘예술’이었다.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이후 뮤지션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3 Days Of Peaces & Music”
“Be A Brother”
1968년, 락큰롤은 저항의 의미와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묶어내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히피 세대들의 전성기였던 그 시기에 열렸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하나의 카운터 컬쳐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비가 내렸고 원래 유료였던 공연이 너무 많이 몰린 사람들 때문에 무료가 되었다. 아수라장이 되기 직전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믿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우드스탁 숲으로 향했다. 미국의 매스컴들은 우드스탁을 주목하고 있었고, 하나의 뮤직 페스티벌이 사회적인 퍼포먼스로 대두되는 순간이었다.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우드스탁은 무사히,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다.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가운데.
우드스탁은 하나의 사회 혁명으로 불리웠고, 그곳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3일간의 우드스탁 페스티발을 “우드스탁 네이션”이러고 명명했다.
당시 또다른 곳에서는 역시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싸이키델릭 락이 한창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흔히 프로그레시브 락이라고 부르는 색다른 편성과 대담한 시도의 락 밴드들이 하나 둘씩 출현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핑크플로이드, 소프트 머신, 킹 크림슨 등이 이에 속했다.
비틀즈 역시 현악기나 시타르의 도입 등으로 새로운 음을 창조하며 프로그레시브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그 당시는 레드 제플린이나 크림, 딥퍼플 등의 하드 락 밴드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하드락과 프로그레시브의 출현 못지 않게 중요한 70년대의 사건이 또 있었다.
바로 데이빗 보위와 마크 볼란 등이 주인공이었던 “글램 락”이다.
이들은 음악이 아니라 외모로 분류된 ‘장르’였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브라이언 이노에서부터 매혹적인 “지기스타더스트”를 창조한 데이빗 보위,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락큰롤의 마크 볼란 까지… 글램 락 뮤지션들은 저마다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로 분류 되는 게 통상적이었다.
물론, 그런 분류에 나름의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음악은 이들의 메혹적이지만 거리감을 조성하는 연출된 외모와 함께 공통적인 글램락의 특성이었다.
1970년대 초반은 락의 역사에서 매우 불행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20세기 인류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는 비틀즈가 “꿈은 끝났다”란 말을 남기고 해산했고,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등의 락 스타 들이 줄줄이 사망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뮤지션들이 심장마비나 약물과용이나 질식사 등의 이유로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신화로 남았다…
13. [1970년대 후반~ : 비즈니스가 된 락] 14. [1976년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 펑크Punk의 출현] 15. [80년대 – 뉴웨이브New Wave, 신스팝Synth Pop, 드림 팝Dream Pop]
70년대가 지나면서 미국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락 문화 역시… 다양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예전의 사회 혁명과도 같은 절박하고 열정적인 모습 대신 서서히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쇼비지니스로서의 락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을 그 무렵, 다른 한 편에서는 달콤하고 듣기 편한 팝 음악이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카펜터즈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들으며 자랐던 젊은이들이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있었고, 락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락과 팝은 그 경계를 조금씩 지우고 있었으며… 재즈의 세계에나 있는 줄 알았던 퓨전 또는 크로스 오버의 경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말라’던 락의 강령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락은 기성세대나 젊은이들의 삶과 긴밀한 연관을 띤 채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끈 것이 바로 FM라디오 보급 등의 물질 문명의 발전이었다.
락 문화의 ‘저항성’이 점점 퇴색되어 가고, 연주의 테크닉과 스타성만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락은 거대한 비즈니스였고 소비 문화의 한부분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레이몬즈나 패티 스미스, 뉴욕돌스, 스투지스 등이 미국에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비틀즈 때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사건은 다시 영국에서 벌어진다.
뉴욕 돌스의 전 매니저였던 말콤 맥라렌의 기획으로 섹스 피스톨즈라는 밴드가 탄생한 것이다.
1976년 나온 섹스 피스톨즈의 데뷔 앨범은 폭탄이었다.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라는 도전적인(사실 시비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제목으로 나온 이 앨범은 펑크 음악의 전형성을 창조했다.
쓰리코드 주의라고 불리우는 단순한 코드와 못하게 들리는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인 연주, 파괴적으로 내지르는 듯한 보컬, 2분여의 짦은 트랙 길이, 일탈적인 외모와 행동과 언어, 영국 황실을 바로 엿먹이는 노골적인 체제 비판의 가사 등이 바로 섹스 피스톨즈였고, 펑크 음악이었다.
펑크가 탄생한 곳은 미국이지만 말 그대로 펑크의 돌풍을 불러일으킨 곳이 영국이었던 것은, 당시 영국 사회의 여러가지 불합리한 문제들을 펑크 음악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영국 황실의 속물적인 권위주의, 높은 물가와 엄청난 실업률 등으로 영국의 젊은이들은 허무와 절망감,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락의 저항성을 대신해 펑크의 네멋대로 해라! 식의 정신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때리고 부수는 펑크 뮤지션들의 행위 자체가 대리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부드럽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발전하는 듯’이 보였던 락은 다시, 펑크를 통해 처음의 원시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락 스타의 반대편에 서 있는 반영웅들이었고, 락 엘리트 주의에 대항해 DIY 에토스라는 가치를 실현한 혁명가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펑크는 펑크 음악이 가진 특성 때문에 오히려 몰락의 길을 간다. 바로 기성 가치와 형식의 부정으로 출발했던 그들의 단순한 연주와 못하게 들리는 노래, 짧은 길이의 트랙 등이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섹스 피스톨즈와 클래시 등이 펼쳤던 펑크의 정신과 태도는 훗날 여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 중에서도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락은 여러가지 면에서 펑크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신서사이저라는 악기의 발전으로 (주로)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부터 다양한 음악적인 효과를 신서사이저를 통해 내게 되었다.
락의 거대화, 펑크의 폭발과 소강이 진행되던 때, 또다른 한쪽에서는 ‘락을 싫어한다’고 공언하던 팝 밴드들이 있었다.
펫숍보이스나 듀란듀란 등의 이러한 “댑스 팝” 밴드들의 음악은 팝이면서도 팝 이상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낭만적인 멜로디와 댄스 비트, 심각한 노랫말은 불안정함 그 자체였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댄스 비트에 열광했다.
스펜다우 발레나 큐어, 디페쉬 모드, 조이 디비전 등이 바로 그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뮤지션들이다. 물론 자세하게 들어가면 각각 다른 스타일과 음악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말이다.
16. [80년대 팝 – MTV의 등장과 거대 팝스타의 등장] 17. [90년대 – 슬래커Slacker 세대의 등장과 얼터너티브 락Alternative Rock] 18. [90년대의 아이콘icon – 너바나Nirvana와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83년 MTV가 등장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81년 8월 1일 첫 전파가 내보내 졌다)
24시간 내내 음악 만을 방송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MTV는 대중 음악의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락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빈번하게 들리고, 팝이나 락이나 이렇다 할 만한 스타가 없었던 그 시대, 슈퍼 스타는 MTV의 화면에서 나오게 된다.
바로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가 팝스타의 서막을 연 장본인들이다..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은 그 누구보다 쇼비지니스 내부의 생리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쪽보다는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이용해서 성공했다.
락 역시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이리저리 요리되어 나타났으며, 시각적인 면이 음악을 평가하는데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뮤직 비디오가 공연 대신 보여졌고, 락의 현장성과 생명성은 사라지는 듯 했다.
물론 락이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거니즘과 대처리즘, 냉전 체제로 요약될 수 있는 그 시기, 락 음악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0년대의 냉전체제 이후, 90년대의 젊은이들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세대였다.
부과되는 책임이나 의무가 한 없이 버거운,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이런 젊은이들을 이르는 “슬래커slacker”라는 말이 등장했고, 음악적인 경향 역시 이런 정서에 연결되어 나타난다.
얼터너티브란 말은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쓰여졌던 말이었다.
주류 팝이나 락에 비판적이었던 이들 방송을 자주 타는 음악이 어떤 의미에서는 주류 팝.락에 대한 “대안”이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학가와 언더그라운드의 락은 90년대 얼터너티브 락의 선배였으며, 이는 이후 평론가들이 규정한 사운드나 장르적인 “얼터너티브”라는 단어와는 구별되는 ‘태도’의 문제였다.
아이러닉하게도 락의 침체기를 연 MTV가 락의 부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데, 이는 상업적인 이유에서 얼터너티브 락이 가지는 상품성 때문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감성과 맞닿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얼터너티브 락을 이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주류 팝의 아성이었던 MTV는 90년대 들어서면 “alternative nation”이 된다.
너바나나 앨리스 인 체인스, 펄잼, 사운드 가든, 스크리밍 트리스 등 시애틀을 중심으로 부상했던 90년대 락 밴드들은 통상 “그런지 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들은 매력적인 춤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팝 스타들과도 달랐고, 속주와 테크닉으로 연마된 실력을 자랑하는- 그리고 팬들의 위에 우뚝 섰던- 락 스타들과도 달랐다.
아무렇게나 입은 면 셔츠와 청바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외모, 운동화나 낡은 부츠 등의 외양을 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멜로디가 아니라 거칠고 징징거리는 기타의 디스토션과 시니컬한 가사, 단순한 코드 등이 “그런지 락” 뮤지션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진지하고 심각했으며,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무력한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이들은 “스타”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처럼 다가왔고, 음악적인 면에서는 장르 규정에 반대하며 열려진 태도를 지켜왔다.
(그랬기에 앞서 말한 사운드 상의 특징은 ‘시애틀 그런지 락’의 일부분일 따름이지 “얼터너티브 락 전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태도라는 개념으로 봤을때 얼터너티브 락은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영역에 걸쳐져 있다)
너바나는 얼터너티브 락 밴드 중에서도 세대의 목소리를 가장 잘 대변했다고 평가되는 밴드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한 뮤지션이기 이전에 90년대 젊은이들의 반영웅anti-hero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분명 시대 정신이었지만, 예전에 락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저항성을 따르지는 않았다. 개인의 피폐해진 내면을 은유적으로 술회하거나, 사회적인 문제들로 인해 고통받는 개인을 그려내는 것이 새로 등장한 얼터너티브 락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얼터너티브가 상업적인 테두리에서 박제가 되어가고 스스로도 연예인이 되어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했던 커트 코베인이 죽은 1994년 이후 얼터너티브 락은 소강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19. [브릿팝Brit(ish) Pop] 20. [90년대 말 – 다종다양한 장르의 공존]
미국에서 얼터너티브 락이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그려가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브릿팝이라는 장르가 떠오르고 있었다. 브리티쉬 락이라고도 불리던 브릿팝은 영국 문화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탄생했다.
블러와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 팝은 비틀즈에서 롤링 스톤즈, 후 등을 연상시키는 복고 사운드를 불러냈다.
브릿 팝 역시 사운드 상으로 하나로 묶기 힘든 장르적 특성을 지녔다.
이를 테면, 도시적인 깔끔함이 돋보이는 ‘블러’와 다소 투박하고 전형적인 초기 락큰롤에 가까운 ‘오아시스’, 심각한 주제를 의도적인 경박함으로 표출하는 ‘펄프’,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이미지의 ‘스웨이드’, 직선적인 사운드의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 이런 식이다.
미국의 ‘대안’이 펑크의 에토스를 이어받은 락이었다면 영국의 ‘대안’은 비틀즈 시대로의 복귀와 팝(덧붙이자면 댄스까지)을 지향한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도 시간이 지남에 블러 2집의 얼터너티브 적인 구성 등 미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게 된다…
락 음악의 역사에서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음악은 늘 있어 왔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이후 크로스 오버나 퓨전이라는 개념이 락/팝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때로는 장르 규정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생겼다.
90년대 들어서면 락은 수많은 스타일과 수많은 개성으로 쪼개지고 또 쪼개진다. 그리고, 타장르의 특성을 고스란히 흡수해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90년대 말, 락을 포함한 대중 음악에서는 장르의 혼성은 기본이고, 샘플링 자체가 하나의 형식으로 굳혀진다.
하드코어의 예를 들면, 펑크에서 갈라져 나온 초기의 지향과 사상이 아닌 사운드만을 90년대에 고스란히 가지고 온 경우인데, 90년대 하드코어는 힙합이나 훵키, 메틀, 테크노 등을 흡수하고 거듭되는 변신으로 살아남고 있다.
세기말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테크노 역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순수한 테크노보다는 다른 장르를 섞은 테크노가 대부분이었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 작품처럼, 이미지 복사나 사운드의 짜깁기(벡Beck을 보라!) 역시 새로운 창조 행위가 되고 있다…
락 내에서 하나의 스타일이 인기를 얻기 보다는 다양한 장르가 다양한 모습으로 쉼없이 생성 소멸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지나간 장르에 대한 향수 또한 두드러지는 시대 상황이 되고 있다.
20세기를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락(큰롤)의 역사는 길어봤자 100년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 십년의 시간을 정리하는 것 또한 어떤 편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뮤지션들과 사회적인 상황을 정리해 가면서 생략한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도움 받은 문헌
2000년대는 어떤 음악이 출현할 것인가?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이고, 어떤 개성을 가진 젊은이들이 출현할 것이며, 그에 따른 변수는 무엇일까…
부족한 글을 접으면서 락은 결국, 삶의 태도며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문화라는 당연한 사실을 한번 더 깨닫는다.
우리가 자라면서 들었던, 그리하여 알게 모르게 우리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준 락/팝 음악에 꾸벅 고개 숙여 인사 한 번 하고 길었던 시간 여행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 [락의 시대 – 저항과 실험의 카타르시스], 시공디스커버리
- 얼트 바이러스 저, [얼트 문화와 록 음악 1.2], 한나래
- 서동진, [Rock, 젊음의 반란], 새길
- 임진모,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창공사
- 신현준,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