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퍼플 Deep Purple이 대한민국에 온단다. 프로모션 투어 때문도 아니고, 잠깐 들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하던 60년대부터 락 음악팬들의 절실한 소원이었던 딥 퍼플의 공연이 이 땅에서 열리는 것이다.
딥 퍼플이 온다고 하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작년 8월의 일이다. 홍수가 나서 둥둥 떠다니는 텐트와 칸막이도 안 되어있던 샤워실과 더럽기 그지없던 공중화장실과 진창이 되어서 발이 쑥쑥 빠지던 공연장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악몽의 트라이포트 말이다.
아침 10시부터 빗 속에서 덜덜 떨면서 난 “대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거지?”라며 중얼거렸었다. 하지만 12시간에 가깝게 비를 맞아가면서 본 멋진 공연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나에게 선사했다.
서울의 비가 다 인천으로 가라~~라며 나를 놀렸던 뽀송뽀송한 방 안의 친구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건 패기찬 크래쉬 때문이기도 하고, 신나기 그지없던 매드 캡슐 마켓 Mad Capsule Markets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록의 딥 퍼플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 그들이 새파랗게 젊던 시절, 딥 퍼플은 영국이 자랑하는 하드 락 밴드 중 한 팀이었다.
헤비메틀 사운드에 가까운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이나 팝적인 비틀즈 The Beatles와는 달리, 딥 퍼플은 신경질적이고 카리스마 강한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의 파워풀한 기타연주와 존 Jon Lord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하드 락의 전형을 제시했던 선구자적인 팀이었다.
1968년 존 로드를 중심으로 결성된 딥 퍼플이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건, 1970년 이언 길런 Ian Gillan이 가입하고 난 후이다. 뛰어난 외모와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가 황금갈기를 가진 사자와 같았다면, 이언은 마치 검은 표범을 연상시켰다 – 큰 키 그리고 탁월한 가창력을 지니고 있었던 이언이 가입하면서 딥 퍼플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이 시절 발표된 <Smoke On the Water>, <Highway Star>, <Strange Kind of Woman> 등은 아직도 락의 명곡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딥 퍼플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공연에서 어김없이 들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 후, 이들이 일시적인 해체를 하기까지 정말 엄청나게 많은 멤버들이 교체되었다.
딥 퍼플의 가계보가 복잡하기 그지없음은 다른 밴드와는 달리 많은 이들이 거쳐갔다는 이유에서도 있지만, 딥 퍼플을 거쳐간 뮤지션들이 모두 락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뛰어난 뮤지션들이라는 데도 그 이유가 있다.
디오 Dio의 리더로 유명한 로니 제임스 디오 Ronnie James Dio나, 화이트 스네이크 White Snake의 섹시한 보컬인 데이비드 커버데일 David Coverdale, 천재적인 기타리스트 토미 볼린 Tommy Bolin, 그리고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평을 듣는 알카트라즈 Alcatrazz와 스틸러 Steeler의 그래험 보냇 Graham Bonnet 등 하드 락 역사상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인물들을 더듬어 올라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 팀이 바로 딥 퍼플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기다란 검은 머리를 휘날리던 날렵한 몸매의 이안 길런 Ian Gillan은 어두운 우아함을 지닌 심볼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73년의 일본공연실황에서 <Child In Time>을 부르던 그는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과 곧게 뻗는 고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어린 시절,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던 나에게 그의 이런 모습은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984년, 그들이 『Perfect Stranger』라는 통산 10번째 앨범을 가지고 재결합을 선언했을 때 나는 세월을 원망했다.
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의 날카로움이 사라져버린 것도 서글펐지만, 이언 길런의 날렵함이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여서 여린 나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멋졌다. 그건 분명히 나이가 주는 연륜과 타고난 천재적인 음악적 능력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에 피어난 건 바로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의 공연은 꿈도 꿀 수 없지만 ㅠ.ㅠ –
그 꿈이 바래져만 가던, 비 내리는 8월의 여름에 만난 딥 퍼플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다시 그들을 보았던 그때보다 15년이나 지나있었지만, 이제 환갑을 넘긴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딥 퍼플의 매력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액슬 로즈 Axl Rose를 연상시키는 짧은 바지를 입고 무대를 종횡무진 해집고 다니던 이언 길런은 사랑스러웠으며 -죄송-, 리치 블랙모어 못지않은 기타실력을 보여줬던 스티브 모스 Steve Morse, 여전히 중후하고 멋진 로저 글로버Roger Glover, 사이키델릭한 하몬드 오르간 연주의 존 로드 Jon Lord도 멋졌다. 그리고 심벌을 칠 때마다 멋진 물보라를 선사하던 이언 페이스 Ian Paice의 환상적인 드럼솜씨는 또 어땠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전율이었다. 공연을 많이 본 편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그렇게 멋진 공연을 경험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희의 세계를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으리라. 한 곡만 보고 들어가서 자겠다던, 그러더니 종국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소리를 질러대던 나의 일행들과, 딥 퍼플을 한물간 노장으로 여겼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의 팬들도 다 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비에 젖은 앰프와 키보드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최고의 악기를 가지고 최고의 시스템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시간에 쫓겨, 비에 쫓겨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짧은 공연이 아니라 딥 퍼플의 명곡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공연중인 그들은 4월 1일날 일본공연을 마친 후, 4월 2일 우리나라에서 공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제 한 주 남은 그들의 공연을 볼 생각으로 난 무척이나 흥분되어있다.
두근두근~~ 공연이 준 감동을 전할 시간은 따로 가지도록 하자.
2000년 4월 2일 딥 퍼플 내한공연 후기
공연날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여니 왠지 비가 올 것 같은 찌푸린 하늘.. 아앙~~ 이럼 안 되는데.. 오늘 공연을 보려면, 가서 줄 서려면 따스해야하는데..
난 마음이 조급했다. 옷을 따스하게 차려입고, 우산도 챙겨야지.. 김밥도 사고, 물도 사서 가야지..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감기몸살에 걸린 것이다. -평상시 코끼리처럼 건강하던 그녀가 왠 일이람. –
일단, 우리의 출발은 보류되어야 했다.
끙끙거리며 높은 열을 자랑하던 친구가 죽어도 공연장에서 죽겠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난 건 오후 3시가 넘어서 였다.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남은 점심을 먹어치우고, 씻고 집을 나서니 5시.. 다행히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올림픽 공원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어있었다. 공연장에 갈 것만 같은 사람들을 따라 멍청히 길을 가다가 이상한 곳에 도착하기를 몇 번.. -하지만 메틀티를 입고 피어싱한 사람이 공연장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가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
결국 우리는 헤매고 헤맨 끝에 지하철 역 바로 옆에 있는 펜싱경기장에 도착했다. -바부들.. ㅠ.ㅠ-
예매영수증을 내밀고 받은 자리는 1열 6block. “좋은 자리시로군요.”
이야호~~
입장은 6시부터란다. 그럼 시간이 별로 없군..
은행에 잠깐 들러서 공연이 늦게 끝날 경우를 대비해 돈을 조금 찾고, 물을 사서 공연장에 들어섰다.
안전요원이 사방에 깔렸다.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까만 천으로 뒤를 가린 무대가 눈에 들어온다.
존 로드Jon Lord의 하몬드 오르간 두 대와 이언 페이스 Ian Paice의 환상적인 드럼 세트 그리고 중간에 위치한 콩가가 인상적이다. 게다가 트라이포트를 연상시키는 스피커 시스템까지..
공연장은 딥 퍼플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락 매니어들과,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찾아온 30, 40대 부부들,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까지. 딸인 듯한 아이를 동행한 뒷 좌석의 아주머니는 대학시절 딥 퍼플의 열열한 팬이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 하셨다.
7시 시작 예정이던 공연이 시작한 건 10분정도가 지나서였다.
경기장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조명이 켜지자 사람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리고 존 로드, 스티브 모스 Steve Morse 등이 천천히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관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언 페이스와 로저 글로버 Roger Glover가 등장해 <Woman From Tokyo>의 서두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야광막대와 팔을 흔들며 열렬히 딥 퍼플을 반겼다.
이렇게 시작된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매력을 더해가는 존 로드의 사이키한 하몬드 오르간 연주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며, 스티브 모스의 힘과 테크닉이 가미된 기타연주 때문에 딥 퍼플의 연주가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의 그 파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게다가 두건을 두르고 선 글래스를 쓴 이언 페이스의 드러밍은 젊은 시절만큼의 파워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힘이 있었고, 로저 글로버의 베이스 연주 또한 매력적이었다. -근데 솔직히 잘 안 들렸다. 아무래도 엔지니어링에 문제가 조금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리고 이언 길런 Ian Gillan은 너무도 귀여워서 동행의 말에 의하면 “깨물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저씨 특유의 포즈로 춤을 추며, 무대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그는 도저히 환갑에 가까운 (그는 45년 생이다) 나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성기에 들려주던 그 환상적인 샤우트 창법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래의 맛을 살릴 줄 아는 관록이 붙어서 딥 퍼플의 곡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1969년을 회상하며 만들었다는 <69>와, <Smoke On the Water>를 시작하기 전 잠깐 들려주었던 <Stairway to Heaven>, <You Really Got Me>를 들으며 우린 그야말로 광란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몸이 아프면 어쩌라.. 어차피 여기서 죽기로 마음 먹고 온 길인데.. 홍대까지의 먼 길을 택시타고 가서 집에서 뻗는 한이 있더라도 난 이 순간을 즐기리라..
그래서 죽어라고 뛰고 소리를 질러댔다. “Smoke on the water/Fire in the sky”를 따라 불렀고, <Black Night>이 연주되는 동안은 미친 듯이 리프를 따라 불러댔다. -글로 그 리프를 표현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프군요.-
스티브 모스의 솔로에 이은 곡이 끝나고 존 로드의 환상적인 사이키델릭 키보드 연주가 시작되자 우린 숨을 멈췄다.
그의 카리스마는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그에 이은 <Perfect Stranger>의 감동은 또 어떻고..
쓸쓸한 <When a Blind Man Cries>나 20분에 가까운 <Speed King>까지..
공연이 끝나고 발을 구르며 박수를 치는 관중들의 앵콜 요청에 들려준 <Highway Star>의 전율은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곡이 끝나고 하늘을 나르던 야광막대들과 -솔직히 멤버들이 맞을까봐 조금 걱정을 했었다 -, 멤버들이 던지던 피크와 스틱들..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인사를 하던 딥 퍼플 멤버들의 모습..
2시간이 조금 넘는 공연을 보느라 목이 쉬고 몸은 엉망이 되어 경기장을 빠져 나오면서, 난 공연이 더 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프로들의 모습이구나. 거장이란 이런 거구나.. 준치는 썩어도 준치라는 말.. 거장은 영원하다는 말.. 그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그리고 잡아탄 택시 안에서 나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밴드가 등장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뻗어버렸다.
아침이다..
공연은 마치 꿈과 같이 아늑하다.